[문화칼럼] 한동민"나혜석, 어찌할 것인가?" (2013.01.08 경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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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276회 작성일 15-04-16 11:35본문
지난 연말 수원문화재단에서 올해의 수원문화예술인으로 화가이자 문학가인 나혜석(羅蕙錫·1896~1948)을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아버지 나기정이 친일파라며 인물선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더 나아가 나혜석이 당시에 혁신적이고 여성사적으로 선구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에 기여한 점이나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수원 하면 화성(華城) 등 조선 정조시대의 문화가 중심’이라는 시각의 편협함이었다.
수원은 화성만이 있는 곳이 아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수원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근현대사의 인물을 선정하는 것을 ‘뜬금없는 일’로 치부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원은 경기남부의 중심지로서 오랜 역사와 인물을 자랑하고 있다. 수원은 200년 전 정조 때 축성한 화성만으로 특정될 수 없는 도시다. 그때가 가장 빛난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에도 한국을 빛낸 숱한 인물들의 땅이기도 하다. 그들에 대한 평가의 오호를 떠나서 수원을 빛냈던 사람들이 많다. 음악의 홍난파와 미술의 나혜석, 문학의 홍사용과 박팔양, 박승극, 최순애 등등. 한국의 근대를 빛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그러나 고향의 봄의 작곡가 홍난파는 친일의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박팔양과 박승극은 월북으로 인해 남녘땅에서 잊힌 사람들이다. 그나마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결혼한 민족의 심금을 울린 동시 ‘오빠생각’의 주인공 최순애조차 우리는 수원사람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가운데 동탄에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유일하게 건립되어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수원을 비롯하여 근대 한국을 나름 볼품 있게 만들었던 그들에 대한 빈약한 우리의 기억은 친일과 용공이라는 덫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이러한 이중의 덫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나혜석조차 아버지 나기정을 친일파로 하여 매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나기정(羅基貞·1863~1915)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군수(郡守)를 지낸 사람은 친일파로 인정하여 사전에 등재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지극히 엄정한 잣대였다. 그러나 사전의 나기정에 대한 서술은 간단하다. “합병 후, 1910년 10월 시흥군수에 유임되었다. 이어 1912년 3월 경기도 용인군수로 부임해 1914년 2월까지 재직했다.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것이 친일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대한제국 때부터 관료였는데, 1909년 시흥군수가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에도 시흥군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자결하거나 관직을 스스로 던져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를 탓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퇴직을 앞두고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3년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기정은 1908년 수원의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고,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설립 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삼일학교 등에 상당한 기부를 한 인물이다. 또한 북문 밖에 뽕나무를 심어 수원지역 최초의 양잠을 장려한 인물 역시 그였다. 나기정은 친일파라기보다 합리적인 관료에 불과하였다. 나기정은 재평가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나혜석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엄정한 평가의 자유도 포함된다. 합리적 문제제기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나혜석의 기념’과 ‘나혜석의 독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혜석과 그의 작품을 보다 깊이 연구하고 평가하는 게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유화가이자 걸출한 문학가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여성해방론자였던 자유로운 영혼의 신여성. 그 다양한 수식어만큼 풍부한 문화콘텐츠를 갖춘 인물, 나혜석을 능가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수원은 화성과 정조와 함께 보다 친근한 근대의 사람들을 콘텐츠로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공장이 없는 수원, 역사문화의 도시 수원이 갈 길이다. 나혜석을 우리는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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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나혜석이 당시에 혁신적이고 여성사적으로 선구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에 기여한 점이나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수원 하면 화성(華城) 등 조선 정조시대의 문화가 중심’이라는 시각의 편협함이었다.
수원은 화성만이 있는 곳이 아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수원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근현대사의 인물을 선정하는 것을 ‘뜬금없는 일’로 치부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원은 경기남부의 중심지로서 오랜 역사와 인물을 자랑하고 있다. 수원은 200년 전 정조 때 축성한 화성만으로 특정될 수 없는 도시다. 그때가 가장 빛난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에도 한국을 빛낸 숱한 인물들의 땅이기도 하다. 그들에 대한 평가의 오호를 떠나서 수원을 빛냈던 사람들이 많다. 음악의 홍난파와 미술의 나혜석, 문학의 홍사용과 박팔양, 박승극, 최순애 등등. 한국의 근대를 빛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그러나 고향의 봄의 작곡가 홍난파는 친일의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박팔양과 박승극은 월북으로 인해 남녘땅에서 잊힌 사람들이다. 그나마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결혼한 민족의 심금을 울린 동시 ‘오빠생각’의 주인공 최순애조차 우리는 수원사람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가운데 동탄에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유일하게 건립되어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수원을 비롯하여 근대 한국을 나름 볼품 있게 만들었던 그들에 대한 빈약한 우리의 기억은 친일과 용공이라는 덫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이러한 이중의 덫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나혜석조차 아버지 나기정을 친일파로 하여 매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나기정(羅基貞·1863~1915)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군수(郡守)를 지낸 사람은 친일파로 인정하여 사전에 등재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지극히 엄정한 잣대였다. 그러나 사전의 나기정에 대한 서술은 간단하다. “합병 후, 1910년 10월 시흥군수에 유임되었다. 이어 1912년 3월 경기도 용인군수로 부임해 1914년 2월까지 재직했다.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것이 친일의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대한제국 때부터 관료였는데, 1909년 시흥군수가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에도 시흥군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자결하거나 관직을 스스로 던져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를 탓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퇴직을 앞두고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3년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기정은 1908년 수원의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고,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설립 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삼일학교 등에 상당한 기부를 한 인물이다. 또한 북문 밖에 뽕나무를 심어 수원지역 최초의 양잠을 장려한 인물 역시 그였다. 나기정은 친일파라기보다 합리적인 관료에 불과하였다. 나기정은 재평가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나혜석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엄정한 평가의 자유도 포함된다. 합리적 문제제기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나혜석의 기념’과 ‘나혜석의 독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혜석과 그의 작품을 보다 깊이 연구하고 평가하는 게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유화가이자 걸출한 문학가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여성해방론자였던 자유로운 영혼의 신여성. 그 다양한 수식어만큼 풍부한 문화콘텐츠를 갖춘 인물, 나혜석을 능가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수원은 화성과 정조와 함께 보다 친근한 근대의 사람들을 콘텐츠로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공장이 없는 수원, 역사문화의 도시 수원이 갈 길이다. 나혜석을 우리는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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