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에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 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나는 이 마을 서당에 다니며 〈동몽선습〉, 〈통감〉, 〈연주시〉등 한문책을 배웠다. 천자문은 집에서 아버지가 미리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동문은 석벽이 남아 있었고 성문은 없었지만 성문을 드나드는 기분으로 다녔다.
동문 밖에 있는 미나리 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가 노는 곳이 있어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아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 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그러던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의 벌이가 잘 안 되어 생활이 너무 궁했으므로 한 40리 거리가 되는 진영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태까지의 나의 세계였던 조그마한 우리 집 - 그 이웃의 동무 아이, 정든 동문 밖 개울들을 버리고 떠나는 마음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이삿짐을 실은 수레가 떠나고 우리도 집을 나올 때, 나는 뜰에 줄지어 심은 키 작은 국화꽃철이 지나 꽃의 빛깔마저 변해 가는 그 국화꽃들이 초라하게 혼자 남는 걸 처량하게 생각했다. 찬바람 부는 길을 걸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걸 느꼈다. 그건 늦가을 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알지 못하는 곳으로 처음 타는 기차를 타고 갈 호기심과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서였던 것 같다.
진영에서의 1년은 외로운 나날이었다. 이웃에 같은 또래의 동무가 없었고, 다니는 서당에도 정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리 집은 진영을 떠나 마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나는 열 살의 소년으로 마산서 비로소 학교에 입학을 했다. 서당의 한문 공부와 다른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과서들은 쉽고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일본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작문을 했다. 나는 그림과 글짓기에서 항상 우등이었다.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이 동요는 곧 이일래라는 분의 작곡으로 마산의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기 시작했다.
이일래 선생은 그 때 마산에 있는 창신학교 선생이셨다.
뒤에 산토끼라는 동요도 그 분의 작사 작곡으로 되었었는데 197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2,3년 후에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고향의 봄>이 발표된 후로 나는 동요 짓기에 열심이었다.
어린이 잡지에는 계속 작품을 보내어 자주 발표되었고, 일간 신문에도 부지런히 발표를 했다.
동요로 해서 나는 전국 각 지방에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 · 대구 · 원산 · 진주, 함경도의 이원, 수원 · 유천 등지에 있는 동요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귀어 편지 왕래가 잦았다.
이원수 1980년 소년 - 흘러가는 세월 속에
창원에 다녀간 이원수 선생님
▲1975년 마산 MBC '명작의 고향' 촬영당시 창원 소답동에서
▲1975년 마산 MBC '명작의 고향' 녹화당시 창원초등학교 앞에서
▲이원수 선생님의 호적부 사본
▲1978년 3월 동화작가 박홍근과함께 소답동에서
1975년 마산 MBC TV '명작의 고향' 에 출연하여서도 창원 소답동을 찾아 똑같은 말씀은 하셨다.
뿐만 아니라 당시 호적부에 선생이 언제 이사를 왔고 이사를 갔는지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호적부를 보면 창원 소답동에서도 몇 차례 이사한 기록까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선생께서 직접 작성 감수한 선생의 연보에도 이러한 사실이 그대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이름으로 발간한 책자 하나만 들추어 봐도 그냥 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 외에도 창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문학작품들이 있다. 이원수 선생의 작품 가운데 <어디만큼 오시나>라는 동시가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흘러가는 세월 속에 엄마 기다리는 아이의 노래>라는 작품에 실고 있다.
" 나는 여섯 살, 누나는 아홉 살,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저녁때가 되어도 오시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가신 산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천주산이다. 하늘 같이 높고 땅덩이만큼 큰 산이었다. "
그 외에도 아버지라는 글에도 창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증명하는 구절이 있다.
" 아버지가 출타하셨다가 돌아오는 때면 -
내가 일여덟 살 때 창원에 살 때다. 와락 달려가서 끌어 안던 생각 "
이를 보았을 때도 창원 소답동과 그 소답동을 포근히 안고 있는 천주산이 선생의 문학작품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