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 소개글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으로 등단한 권정생은 자연과 생명, 어린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다뤄왔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물과 힘겨운 인간의 삶을 보듬는 따뜻하고 진솔한 글로 어린이는 물론 성인 독자들로부터 폭넓게 사랑받았다. '몽실언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는님의 눈물, 등 다수의 아동 문학작품을 남겼다. 1984년 출간된 '몽실언니'는 60여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한 아동문학계의 대표 베스트셀러.
그는 1937년 일본 도쿄 변두리 빈민촌의 헌옷 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행상에 넝마주의였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했다. 이때 아버지가 주워온 헌책 더미에서 '인어공주' 와 같은 동화책을 읽으면서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
광복을 맞아 가족이 귀국해 외가인 청송군 화목면에서 초등학교를 1년간 다녔다. 이후 아버지 고향인 안동군 일직면으로 이사했으나 비루한 살림에 더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를 해다 병아리를 사 키우는 등 힘든 소년기를 보냈다.
좀 더 커서는 안동읍내의 한 잡곡상에 취직했지만, 저울을 속이라는 주인의 말에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 길로 월급도 안 받고 부산으로 향했다. 재봉털 수리도 하고, 신문도 배달하며 힘겹게 살던 중 열여덟 살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신결핵까지 얻었다.
고향에 왔지만, 동생이 결혼하면서 함께 살 수 없어 집을 나오게 된다. 이후 그는 예천 등을 떠돌며 거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나이 서른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부모는 죽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이후 일직면 조탑리의 교회 종지기를 시작하며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켜 동화를 쓰게 된다.
그는 40년 가까이 병을 달고 살았다. 오줌도 호스로 받아냈고, 하나밖에 없는 신장마저 결석으로 고통받았다. "하루라도 안 아프고 살아봤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얼마나 아팠으면 지나가는 말로 "니(김용락)가 내 대신 아파도고." 라고 했을까. 건강이 좋았을 때도 여름에 '풀짐을 한 짐 지고 있는 것' 처럼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소외받고 힘없고, 약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삶의 희망과 믿음을 그려낸 동화를 썼다. 1967년 '강아지 똥' 만 해도 그렇다. 아무 쓸모없다고 슬퍼하던 강아지의 똥이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 는 흙의 말을 듣고 희망을 얻어 거름으로 부서져 고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다. 대표작인 '몽실언니' 에 나오는 인물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천대받는 이들이다.
그는 철저히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새 옷을 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 겨울에도 헌 군복에 누비 솜바지에 고무신을 신었다. 살림도 20년 가까이 벽지도 안 발린 헛간에 다 그을린 양은냄비, 석유곤로가 고작이었다. '몽실언니' 의 인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던 흙집을 지었고, 최근에야 8인치 TV를 들였다고 한다.
'겨울이면 생쥐들이 와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 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그렇다고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몽실언니' 만 하더라도 1년에 4만 부가 팔린다. 인세만 3천200만 원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의 책은 약 80여 종에 이른다. 그는 돈이 생기면 남을 위해 다 썼다.
서울 청량리 윤락녀 쉼터 짓는 데도 보냈고, 앵벌이들을 위한 보호소를 짓는 데도 기부했다. 그는 어린이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어린이들을 상대로 판 책 수입인데, 어린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는 생각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남달랐다. "배고프셨던 어머니 / 추우셨던 어머니 /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 ... / 어머니와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 오래오래 살았으면..." (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중에서 ). 지금쯤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도 함께 구경하고 있을까.
"내 죽을 때 300만 원 있으면 된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돈으로 화장해 집 근처에 뿌리고, 집도 없애 자연 상태로 돌리고, 기념관도 절대 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철저한 무소유에 금욕으로 평생을 산 그는 처음 올 때처럼 '무' 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아프고, 평생 외롭고, 평생 힘들었던 그는 유언장에 이렇게 썼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스무 다섯 살의 건장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스무 두세 살 된 아가씨와 연애하고 싶다. 그때는 벌벌 떨지 않을 것이다.'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196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마치(本町)의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토리로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키도 작고 손도 조그만 히데코 누나는 항상 말이 없고 외로워 보였다. 함께 극장에 가면 고구마튀김을 수건에다 겹겹이 싸서 식지 않도록 품속에 넣어뒀다가 영화가 중간쯤 진행될 때 꺼내어 내 손을 더듬어 쥐어주던 그 따뜻한 촉감은 평생을 잊을 수 없다.
아무렇게나 흘러들어와 모여사는 빈민가 사람들의 가족구성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골목길 끄트머리 노리코네 아버지는 조선사람, 어머니는 일본여자, 노리코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딸이었다. 건너편 집의 미치코는 주워다 키운 아이고 동생 기미코는 조선아버지와 일본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고 우리 앞집 일본인 부부도 양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 집 건너 경순이는 관동지진 때 부모를 잃고 거기서 식모살이처럼 얹혀살고 있었다.
경순이는 가끔 얻어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우리집으로 쫓겨왔다. 어머니는 어루만져 달래주고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경순이에 대한 추억은 이따금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스무살이 넘었을 것이라 했지만 경순이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몰랐다. 오테다매팥주머니를 만들자면 보통 팥알을 넣는데 경순이는 그럴 수 없어 우리집 추녀밑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자잘한 돌멩이를 골라 만들곤 했다.
소설 <몽실언니>는 혼마치에 살았던 히데코 누나이기도 하고 경순이 누나이기도 하고 그외의 가엾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1946년 해방 이듬해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때, 조선인연맹에 가입했던 형님 두 분은 다음에 돌아오기로 했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울타리의 동백꽃이 피던 3월에 후지오카의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차에 오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떠밀려 태워졌고 차는 떠나고 말았다. 만 8년 6개월 동안 어렵지만 정들어 자라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가슴이 쓰리고 서러운 일이었다.
1946년 4월은 보릿고개가 심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먹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 세끼 먹는 집은 드물었다. 만주와 일본에 갔던 동포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는 우리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외가가 있는 청송으로 갔고 아버지와 누나는 안동으로 갔다. 함께 모인 것은 47년 12월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네 군데 다녔다. 도쿄의 혼마치에서 8개월, 군마켓에서 8개월, 조선에 와서 청송에서 5개월, 그리고 나머지는 안동에서 졸업을 했다. 그것도 잇따라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달씩 몇 년씩 쉬었다가 다니는 바람에 1956년 3월에야 겨우 졸업을 했다.
아버지의 소작농사만으로는 월사금을 못내어 어머니가 행상을 하셨다. 한달에 여섯 번씩 가시는데 장날 갔다가 다음 장날 돌아왔다. 그러니 자연히 밥짓는 일은 내가 맡아야 했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설거지하고 학교 가자면 바쁘게 달려가야 했다. 그때 열살 때부터 밥을 짓는 것을 배웠으니 훗날 혼자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장수였고 다음이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그리고 점원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 살때부터였다. 처음엔 숨이 차고 몹시 피곤했지만 그런대로 두 해를 더 버티다가 결국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나 말고도 10여명이나 되었다. 식모살이 갔던 성애와 철도기관사 조수로 일하던 태호, 산판에서 일하던 청수, 기덕이, 옥이, 성란이 우리는 이따금 나오는 항생제를 배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약이 필요한 만큼 공급되지 않아서였다.
하나 둘씩 차례로 죽어갔다. 열일곱살의 기덕이는 빨간 피를 토하다 죽고, 열다섯살의 옥이는 주일학교 동무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 죽고 마지막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갔다. 병을 앓는 나도 고통스럽지만 식구들의 고통은 더 심했을 게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 병구완하시느라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장티푸스를 잃으면서 실신하시고 셋째는 열일곱 살 때 잃고, 둘째와 넷째는 해방 이듬해 헤어진 뒤 결국 다시 만나보지 못하셨다. 그런 어머니는 1954년 가을에 세상을 뜨셨다. 몸져 누우시기 전날까지 병든 자식 걱정하며, 헤어진 자식 기다리며 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그래서 이 무렵 나는 동생을 결혼시켜야 하니 어디 좀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무작정 집을 나왔다.
1965년 4월에 나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그때 대구에서는 이윤복군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가 영화화되어 거리마다 극장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나는 대구에서 김천으로, 상주로, 점촌, 문경, 예천으로 3개월을 떠돌아다녔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걸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병 한 가지를 더 얻었다. 그때부터 앓기 시작한 부고환결핵으로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올랐다. 산길에 쓰러져 누워 있다보면 누군가가 지나다 보고 간첩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서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한평생 당신들의 집이 없었다. 가엾은 분들이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팩팩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 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 집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심성이 착해서 좋다. 이름을 '뺑덕이' 라 지었더니 아이들이 왜 하필이면 뺑덕이라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미가 훨씬 인간적인 가엾은 여인이어서 좋기 때문이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 살다가 지금은 이곳 산 밑에 그 문간방과 비슷한 흙담집에서 산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굶주림,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앞서간다는 선진국은 한층 더 심하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살인을 한 대가로 얻은 풍요를 누리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일 따름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선진과 후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단도 하루속히 무너뜨려야 한다. 경제적 후진만으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 가봤는가요?"
"예, 못 가봤습니다. "
"그럼, 연애도 못 해봤나요?"
"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6)>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