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선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 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나는 이 마을 서당엘 다니며 <동몽선습>, <통감>, <연주시> 등 한문책을 배웠다.
<천자문>은 집에서 아버지가 미리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동문은 석벽이 남아 있었고 성문은 없었지만 성문을 드나드는 기분으로 다녔다.
동문 밖에 있는 미나리 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가 노는 곳이 있어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아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 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나는 그런 그림 같은 경치 속에서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하고 이웃에 사는 동무 아이와 같이 즐겁게 놀며 자랐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의 벌이가 잘 안 되어 생활이 너무 궁했으므로 한 40리 거리가 되는 진영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태까지의 나의 세계였던 조그마한 우리 집 - 그 이웃의 동무 아이, 정든 동문 밖 개울들을 버리고 떠나는 마음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이삿짐을 실은 수레가 떠나고 우리도 집을 나올 때, 나는 뜰에 줄지어 심은 키 작은 국화꽃들-철이 지나 꽃의 빛깔마저 변해 가는 그 국화꽃들이 초라하게 혼자 남는 걸 처량하게 생각했다. 찬 바람 부는 길을 걸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걸 느꼈다. 그건 늦가을 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알지 못하는 곳으로 처음 타는 기차를 타고 갈 호기심과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서였던 것 같다.
진영에서의 1년은 외로운 나날이었다. 이웃에 같은 또래의 동무가 없었고, 다니는 서당에도 정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리 집은 진영을 떠나 마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나는 열 살의 소년으로 마산서 비로소 학교에 입학을 했다. 서당의 한문 공부와 다른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과서들은 쉽고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일본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작문을 했다. 나는 그림과 글짓기에서 항상 우등이었다.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나는 그 동요를 그때 애독하던 방정환 선생의 잡지≪어린이≫에 투고해서 1926년 4월호에 발표되어 은메달을 상으로 받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의 봄> 1926년
이 동요는 곧 이일래라는 분의 작곡으로 마산의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기 시작했다.
이일래 선생은 그 때 마산에 있는 창신 학교 선생이셨다. 뒤에 <산토끼>라는 동요도 그 분의 작사 작곡으로 되었었는데 197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2,3년 후에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고향의 봄>이 발표된 후로 나는 동요 짓기에 열심이었다. ≪어린이≫잡지에는 계속 작품을 보내어 자주 발표되었고, 일간 신문에도 부지런히 발표를 했다.
동요로 해서 나는 전국 각 지방에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 대구· 원산· 진주, 함경도의 이원, 수원 · 유천 등지에 있는 동요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귀어 편지 왕래가 잦았다.
수줍던 시절
내 젊었을 적 애기니까 옛날 얘기일 수밖에 없다. 내 나이 십팔구 세 때, 벌써 오십 년쯤이나 지나간 옛날이다.
어린 시절을 나는 경남 마산에서 자랐다. 산과 섬으로 에워싸인 조용한 바다를 앞으로, 춤추는 두루미같이 널찍한 깃을 벌려 항구 동네를 안고 있는 뒤쪽의 무학산에 안겨서 자란 나는, 몹시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었다.
이렇게 사교성 없고 활발하지 못한 내 성격이라 양적으로 많은 친구를 갖진 못했으나, 한번 사귀면 오래오래 정다이 지내는 편이어서 외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두 남자 친구지 여자 친구라고는 없었다. 그 시절의 사회에서는 남녀교제는 흔치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년인 나는 소녀들을 보면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인지 말 한 마디 걸어 본 일도 없는 소녀가 맘에 들어 그리워하기도 했고……, 그 아이 집 앞을 공연히 지나다녀 보기도 하는……, 그런 수줍음 덩어리 같은 나였다.
이런 나에게 실로 가슴 설레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아카시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청순해 보이는 처녀와의 교제가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서울에서 공부하는 어느 여학생이 내게 편지를 보내 왔었다.
그 편지에는, 신문이나 학생 잡지에 나는 내 동시를 보고는 항상 반가워했다는 얘기와, 개벽사에 방정환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고향이 마산이면 이원수를 아느냐고 묻더라는 얘기, 그리고 고향에 가거든 만나보라는 말씀까지 하더라는 말과, 방정환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얘기들이 씌어있었다.
나는 곧 답장을 했는데, 이 때부터 그녀와 나 사이에는 끊임없는 편지가 오갔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여학생이라 그녀는 자기 사진을 보내 주었고, 어서 여름 방학이 되면 좋겠다고 나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보지 못한 그녀에게 대한 호감이 날로 그리움 같은 감정으로 익어갔다.
그러던 늦은 봄, 뜻밖에 그녀로부터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여름 방학이 아닌데도 무슨 일로 갑자기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철길 건널목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맑고 의젓한 그녀의 모습.
황홀이라는 말은 그때 내 정신 상태에 꼭 들어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바로 황홀경에서 나는 나 자신이 못나게도 말이 없는 반벙어리 같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한층 수줍음만 더해 갔다.
그녀는 집에서 나와 추산 공원으로 산책을 하자고 했다. 추산정 우거진 숲. 아카시아 꽃이 가득 피어 싱그러운 향기를 뿜고 있었다.
산길을 오르며, 또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그녀와 나는 손을 잡고 거닐었다. 그녀가 재미있게 얘기를 하는데도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무슨 얘기를 할까? 무슨 얘기를 해야 이 값진 자리와 소중한 시간에 어울릴 것인가? 그런 생각만 했지 얘기의 소재는 찾지도 못했다.
차라리 아무 말 없어도 좋은 것이라면 …… 그게 내게는 더욱 행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카시아 향기. 말없이 풍겨오는 그 달고도 새콤한 꽃향기 속에 우리는 오래 앉아 있은 것 같다.
그 꽃향기 속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정겨운 향기가 또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나는 그녀의 향기라 믿었다.
그 향기는 또 신비스런 세계의 향기로 내게는 느껴졌고, 그것도 내가 여성에 대해서 신비스러움과 존귀해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성에 관한 즐거움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로서는 그러한 친구들이 야비하고 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나의 여성관이나 감정을 나의 미발달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우리는 그 아카시아 꽃 수풀 아래에 오래 앉아 있었다. 처음 만난 날이라 서먹서먹한 데가 없지 않았지만 이 날까지 이미 주고받은 편지로 해서 우리들의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고 그래서 자주 만난 사람의 사이처럼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주렁주렁 피어 늘어진 아카시아 꽃송이, 초여름 바람에 오고가는 꽃향기와 그녀의 향기가 함께 섞여 내 가슴 깊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여섯 살, 누나는 아홉 살,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저녁때가 되어도 오시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가신 산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천주산이다. 하늘 같이 높고 땅덩이만큼 큰 산이었다.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같이 그 높은 산에 가서 솔잎을 긁어모아 커다랗게 단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오실 것이다.
저녁 해가 엷은 볕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만큼 오고 있을까?”
누나와 나는 저녁볕이 남아 있는 토담에 붙어 서서, 돌과 흙으로 된 그 담벼락을 천주산으로 생각하고 그 담의 울퉁불퉁한 곳들 사이로 난 골을 산길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지금 이 길로 내려오고 있는 거야. 이리로 이리로 내려와서 이 아래까지 오면 동네에 들어오는 거니까 좀더 기다려야지.”
나나가 설명을 해 주면 나는 그 담벼락을 지켜보며 어서어서 어머니가 아래까지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아직 다 안 내려왔어?”
“지금 여기쯤 내려오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누나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무를 머리에 인 어머니처럼 조금씩 아래로 움직여 내려오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참 있다 누나는,
“인제 산을 다 내려왔으니께, 서성 밖 고개를 넘고 있어.”
“서성 밖 고개? 아, 이제 금세 오겠다.”
그러나 기다려도 좀처럼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는 시늉을 너무 빨리 했기 때문이었다.
살림이 어려워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닌 가엾은 어머니, 그 어머니는 이미 옛날에 돌아가셨지만 담벼락 산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는 나뭇단을 인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역력히 눈에 보인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의 노래 - <어디만큼 오시나>는 그 후 내가 커서 쓴 동시이지만 그 동시를 쓰게 된 동기는 내 여섯 살 때의 어머니를 기다리던 추억에서였다.
엄지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읍내 저자 다 보시고
신작로에 오시지
둘째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아기 신발 사 가지고
고개 넘어 오시지
셋째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예쁜 아기 젖 주려고
언덕길에 오시지.
넷째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아기 보랴 종종걸음
다리 건너 오시지
꼬마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동구 밖에 다 오셨다.
엄마 마중 나가자.
- <어디만큼 오시나> 1936년
이 노래는 혼자서 제 손가락 하나하나를 붙들고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담벼락을 산길로 생각하며 어머니가 내려오시는 걸 상상하던 내 여섯 살 때의 일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36년에 <어디만큼 오시나>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아홉 살 때, 잠시 가서 살던 진영에서는 심심하면 곧잘 역에 나가서 기차를 구경하곤 했었다.
별별 손님을 내려놓고 가는 기차. 기관차에서 불가마에 석탄을 떠 넣는 화부의 솜씨. 파란 기와 빨간 기를 흔드는 역부의 재미있어 보이는 신호.
차료를 사 가지고 기차를 기다리는 손님들.
그런 걸 보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은 보따리에 바가지들을 달아매고 먼 길을 떠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혼자가 아닌 한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 가난에 찌들려 살 수가 없어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었다.
역에서 바라다 보이는 넓은 벌판. 수리 조합 논들이 멀리 멀리 펼쳐져 있어, 해마다 곡식이 나는 황금 들판이건만, 먹고 입을 것이 없어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웬일일까-.하고 나는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없는 일의 하나로 생각되었다.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 중에는 고향에서 농사지을 땅이 없어 땅이 넓은 함경도나 북간도로 가는 이들과, 노동을 해서 벌어먹고 살려고 공장이 많은 일본으로 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까지 땅이 모자라서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건 반드시 땅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농사를 지어도 빼앗기는 것이 많아서였다.
이렇게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마산에서도 역에 나가면 으레 눈에 띄었다.
농촌에서 이웃집이 떠나는 걸 보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들의 슬픔 같은 걸 내 가슴에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외국의 압제를 받고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당하는 결과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더욱 크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강 건너 산 밑으로
기차가 가네.
멀리 가느다란
연기 뿜고서
언덕 위에 올라선
어린 두 형제
사라지는 연기를
바라봅니다.
언니 태우고 간 기차
말 하나 없이
달이 열 번 둥글어도
안 데려오니,
언니 소식 언제나
들어보나요.
오늘도 벌판에는
해가 집니다.
-<기차>1928년-
낙동강 건너편 언덕으로 기차가 간다. 하얀 연기를 기다랗게 뽑아 놓고 가는 그 기차를 멀리 바라보며 서 있는 어린 소년의 형제가 있었다.
큰형이 집을 떠난 지 일년이 가까워졌건만 소식도 없어 편지를 기다리는 아우들이다.
가족을 두고 떠난 젊은이면 일본으로 노동일을 하러 간 것이 분명하다. 앞의 <기차>라는 동요는 그러한 형제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었다.
나는 이곳저곳 부모님을 따라 이사해 가며 살긴 했지만, 머나먼 북간도나 일본으로 떠나가지는 않았다. 그만치 다행한 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그 일이 나 자신의 일같이 생각되었고, 그들의 슬픔이 또 내 슬픔인 것 같이 느껴졌었다.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잘 가거라>는 1930년의 내 동시다.
수남아, 순이야, 잘 가거라.
아빠 따라 북간도 가는 동무야.
멀리 가다가도 돌아다보고
‘잘 있거라’ 손짓하며 가는 순이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눈물이 나서
아른아른 고갯길도 안 보이누나.
뻐꾸기 자꾸 우는 산길 넘어서
수남아, 순이야, 잘 가거라.
- <잘 가거라> ,1930-
국민학교(그때는 보통학교라 했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바뀌었는데, 새로 우리 반 담임이 되신 선생님은 학교에서도 소문난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모두 새 담임선생님이 싫었다. 별명이 불칼이었다.
불칼 선생님은 과연 무서웠다. 공부 시간에 장난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불러내어 교실 밖으로 내쫓으셨다. 화가 나시면 아이의 엉덩이를 발길로 차서 내쫓기도 하셨다. 그러면서 으레 하는 말이 있었다.
“그러고도 네가 단군의 자손이냐? 이 돼먹지 못한 녀석아!”
우리는 그 때 불칼 선생님이 자주 들먹이는 단군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단군 임금에 대해서 학교에서는 일절 배워 주지 않았던 것이다. 불칼 선생님은 이따금 우리나라 역사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런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선생님의 눈은 빛나고 말소리는 칼날같이 날카로웠다. 불칼 선생님은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 버리셨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맞지 않는 교사라 해서 쫓겨 갔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선생님은 곧잘 ‘우리’란 말을 쓰시었다. 그 ‘우리’란 말 속에는 ‘우리민족’, ‘우리나라’라는 뜻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서, 주인이 되어 우리들을 부리고 피땀을 짜가는 일본에 저항하는 정신을 가진 그 불칼 선생님 덕택에 우리들도 많은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즈음, 나는 내가 꾸미고 내가 등사 인쇄를 해서 내던 우리 반의 신문에 쓴 글 때문에 교장 선생님께 몇 번이나 불려가서 호된 꾸중을 들은 일이 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쓴 글이었다. 어느 일본 사람이 자기 뽕나무 밭에 들어와 오디를 따 먹은 아이를 잡아 놓고 염산수로 이마에 도둑이라 써서 지워지지 않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에 흥분한 나는 그 일본 사람의 야만적인 행동을 비난한 나머지 왜놈이란 말까지 썼던 것이다.
이 반회 신문 때문에 한국 사람이었던 우리 반 담임이 일본 사람으로 바뀌었고, 수신(도덕) 시간에는 특별히 교장선생(일본인)이 와서 가르치게 되었었다. 나는 그 때까지 늘 갑(甲: 지금의 수)이었던 조행 점수가 을(乙: 지금의 우)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겪음으로 해서 우리나라, 우리 겨레에 대한 생각은 넓혀져 갔음이 분명하다.
내가 쓴 소년소설 <오월의 노래>에 ‘우리말 사건’이란 이야기가 있다. 학교에서 일본말을 쓰고 조선말은 쓰지 않게 하려는 정책에 의해서, 우리말을 쓰는 아이에게 벌금을 내게 하는 데 대한 이야기다. 우리말 한 번 하는 데 벌금 3전(그 때 우표 값이 3전- 지금의 약 30원)씩을 내게 하는데, 이런 벌금을 곧잘 내게 되는 아이들이 소년회에 다니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학교에서는 소년회의 회원이 되는 것을 금하게 되어, 소년회는 비밀히 나가야 하게 되는데, 이 소년회라는 것이 또한 우리 민족의 마음을 깨우쳐 주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소년회에서 하는 동화 대회 같은 데서 연극도 해보고, 노래도 불러 보았다. 글짓기, 연극하기, 등산, 축구 ……. 갖가지 소년회에서 하는 일은 모두 재미있고 즐거운 것뿐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우리’라는 생각을 더욱 굳게 해 준 불칼 선생님이나 소년회나 모두 나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굳어진 ‘우리’란 생각 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의 전부인 우리 민족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역시 같이 자라고 있었다.
내 아버지는 나이 50에 첫아들로 나를 두셨다. 딸만 있던 집에 그리고 나를 둔 후로도 딸만 둘을 더 둔 아버지는 상냥하고 다감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따르고 좋아했었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많았던 모양으로 목수 일을 잘 하셨다. 그냥 집을 짓거나 큰 재목을 다루는 목수라기보다 잔 물건을 잘 만드셨다. 나는 아버지가 가끔 이웃 읍이나 촌에 가서 그런 일을 해 주느라고 3,4일 나가 있다 오시게 되면 아버지를 몹시도 기다려 애가 탔었다.
아버지가 만드신 물건들은 집에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서 잘 몰랐지만, 집에서 만든 가야금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동나무를 말려서 만든 가야금. 그리고 그 가야금 머리에 칼로 새겨 붙인 춤추는 학은 단청을 해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손수 만든 가야금으로 이따금 산조를 연주하셨다. 어릴 때 들은 산조의 가락은 인상 깊은 추억처럼 내 일생 잊혀지지 않고 지금도 들을수록 좋은 음악으로 여겨진다.
아버지가 출타하셨다가 돌아오는 때면 - 내가 일여덟 살 때 창원에 살 때다 - 와락 달려가서 끌어안던 생각. 늦은 가을이었던가 싶다. 내가 아버지를 끌어 잡았을 때, 그 흰 두루마기에서는 분명 바람 냄새가 났었다. 들길을 불어 가는 찬 바람의 냄새. 그 찬 두루마기 속에 있던 따뜻한 아버지의 체온까지를 함께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냥 하시면서도 엄격한 데가 있었다. 내가 진영에 살 때 (아홉 살 때) 나는 어머니의 약에 쓸 할미꽃 뿌리를 캐러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동네 뒷산에 오른 일이 있었다. 산길을 가는데 마침 지게에 나무를 지고 오는 나무꾼을 만났다. 앞서 가던 나는 나무꾼과 마주쳤을 때, 좁은 산길에서 미처 피하지 못했는데 무거운 짐을 진 나무꾼이 길 아래로 비켜서서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주었다. 뒤에서 이 광경을 보신 아버지가 화난 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짐을 지지도 않았는데 어찌 먼저 피해서 짐 진 사람에게 길을 내주지 않았느냐? 일하는 사람에게 겸손하고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해!”
일하는 사람을 낮춰 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내 마음에 커다란 깨달음을 갖게 해 주었다.
그런 아버지를 나는 마산에서 살던 15세 때, 겨울 눈 오는 날, 무학산 허리에 장사 지내고 외로운 소년이 되었던 것이다. 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기에 안계시지만, 번연히 살아 계시는 아버지를 먼먼 곳에 두고 그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내 동무 아이들 중에도 그런 아이가 여럿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먼 데로 벌이를 하러 간 아버지였다. 나는 그런 나의 아버지를 내 아버지인 듯이 여기며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을 나 자신인 듯이 느끼며 시를 썼었다. 바람 부는 겨울 들판에 줄지어 서 있는 전신주. 그것을 보고 쓴 시다.
전봇대
전봇대,
바람 부는 들에 나란히 서서
손에 손 서로 잡고
어디까지 이었나?
눈 오는 함경도는
아버지 계신 곳
게까지도 이었나?
전봇대는 먼뎃말도
전해 준다지
귀 대고 천 리 밖에
말도 한다지.
전봇대
전봇대,
아무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는
울 아버지 소식 좀
전해 주려마.
- <전봇대> 1935년 -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었다. 내가 알기만 해도 처음 양산 북정리라는 데서 나서 창원으로 왔고, 창원에서 진영으로, 진영에서 마산으로 이사해 왔다. 그러나 같은 시내에서도 여러 차례 집을 옮겨 살았다. 그런 이사는 셋방살이를 하느라고 한 것이기도 하고, 집을 사기 위해서 또는 새로 짓기 위해서 한 것이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셋방살이를 할 때의 기분은 참 서글프고 집 주인에게 눈치가 보이기도 하였는데, 그런 남의 집에 세들어 살기를 내 일생에도 수없이 많이 했다. 어쨌든 자기 집이 없이 남의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요즘에도 많지만, 5,60년 전에도 많았다. 집세는 자꾸 올리려 들고, 그러기 위해 집 주인은 전부터 세 들어 있는 사람을 내보내고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세를 놓으려 든다.
이 가엾은 신세의 집 없는 사람들의 이사는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동시 <이삿길>은 나 자신의 일이나 다름없는 이사 가는 소년의 노래다.
다글다글
다글다글....
언니가 끌고가는 구루마 앞에
누이는 등불 들고
나는 뒤에서 밀고
이 밤에 우리는 이사를 간다.
가는 집이 어딘지
그건 몰라도
언니만 따라서
낯선 골목을
구루마 다글다글
이사를 간다.
어머니는 셋방살이 설워하시고
언니는 집 임자와 말다툼하고
나는 구루마에 짐만 실었다.
우리도 좋은 집 살 때 있겠지.
고리짝 궤짝 이불 보퉁이
내 책상, 우리 살림
모두 싣고서
내일 낮도 좋으련만
밤중에 간다.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
사정을 해도
집 주인 고집통이
들지를 않아
우리도 언제나 언제나……하며
주먹을 쥐어 보고 또 쥐어 보며
부랴부랴 싣고 가는 우리 이삿짐
다글다글 구루마
바퀴 돌아가듯이
어려운 세상 어서어서 지나가거라.
지나가거라.
누이야, 꺼진 등불 그만 두어라.
다글다글 끌고 가는 낯선 골목에
달이
스무날의 달이 솟는다.
<이삿길> 1932년
*구루마 : 짐수레의 일본말
이 <이삿길>이란 동시는 그 즈음 일반 동시에 비하면 많이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자유시로 씌어진 점. 그러나 그 속에는 7.5조의 가락이 곳곳에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형식보다 그 내용이 빈곤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서 현실의 생활을 잘 나타냈다는 말을 듣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사상적으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칭찬에나 어떤 비난에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직 침략자 일본의 정치 아래에서 고생하며 사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말도 못하고 잘 사는 체하는 거짓스런 행동은 할 수 없었고, 그런 시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상업학교를 다닌 나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함안읍으로 취직이 되어갔다.
직장은 금융조합 - 지금의 농협과 같은 곳이다. 예금을 받고 농사에 필요한 자금은 꾸어 주고 하는 금융 기관이다. 한적한 조그만 읍에 살게 된 나는 그 직장의 사무를 보면서 나 스스로 문학 공부를 하려고 결심을 했다.
스스로 한다는 공부란, 오직 책으로 하는 길밖에 없다. 문학 공부에 필요한 책을 널리 사서 읽어야 했다. 그 책들은 모두 일본에서 사들여 와야 했다.
문학 공부란 시나 글을 쓰는 기술을 배우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오히려 맨 나중에 닦아도 된다. 사회를 바로 알고, 사회에 대한 생각을 바로 하며,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인가를 알고 그러한 삶을 표현하는 일 -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예술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화려한 시각적인 것이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자극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나 자신과 남을 함께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악을 미워하고 선을 받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농촌에서 살면서 나는 내 고향 마산과 같은 바닷가 동네에서 보지 못하던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특히 산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그런 곳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일이 많았다.
내가 방을 빌려 세 들어 있던 집의 주인의 아들은 열두 살쯤 되었는데 학교에 갔다 오면 잠시 쉴 틈도 없이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서곤 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것이다.
그것도 추운 겨울날이면, 돌멩이라도 던지면 짱 하고 깨질 것 같이 얼음장처럼 된 하늘 아래 손을 호호 불며 나무를 하는 소년, 그런 소년은 그 집의 그 애뿐이 아니었다.
나의 동시 <나무 간 언니>는 그런 소년을 두고 쓴 것이었다.
이 추운 날도
언니는 지게 지고 나무 가셨다.
호오호오 손 불면서
나무 가셨다.
솔밭 부는 바람은 위잉위잉……
골짜기 개울은 꽁꽁 얼어서
춥단 말도 안 나오는
저기 저 산.
해야
번쩍이는 해야,
좀더 내려와서
나무하는 우리 언니
쬐어나 주렴.
-<나무 간 언니>·1936년
이 시를 지금 다시 읽어 보면 내게도 의문이 생기는 점이 있다.
‘언니는 지게 지고 나무 가셨다. 호오호오 손 불면서 나무 가셨다…….’고 한 이 구절에서 ‘……가셨다’라는 말이 어째 씌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 쓴다면, ‘……나무하러 갔다.’ 로 할 것 같은데 형에 대해 ‘가셨다’라고 경어를 쓴 것은 이상하다.
형제간의 연령 차이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렇게 공경하는 말을 쓴 것은 이상하다.
형제간의 연령 차이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렇게 공경하는 말을 쓴 것은 아무래도 나 자신이 그 산에 나무하러 간 소년을 높이 받들어 생각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힘들여 일하는 사람, 그들이 어른이든 아이든 소중히 생각하며 얕보지 않아야 한다는 내 생각이 고집스러워 그렇게 된 것만 같다.
나는 한적한 농촌에서 살아도 조금도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비록 시골에 묻혀 있어도 시를 쓰는 친구들과의 연락은 언제나 한결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발표하고 또 편지로 자주 우정을 익혀 가던 때였다. 그 중에도 동요 <오빠생각>을 써서 나와 알게 된 수원에 사는 소년 최순애와는 7년이 넘어 편지로 사귀어 왔다. 그러다 나는 그를 만나로 수원으로 여행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딸만 계속 넷을 낳고 처음으로 아들 하나를 낳은 어머니는 심한 산고를 겪으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타한 아버지는 득남의 기쁨도 모르고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다.
그 후 어머니는 또 딸 둘을 낳아 나는 결국 여섯 딸에 단 하나의 독자로서 어머니에게는 귀하기 짝이 없는 아들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창원, 웅진 출신으로 무학이었다. 가난한 사람에서, 내가 7~8세 때에는 가끔 산에 가서 나무를 하시던 걸 기억한다.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천주산은 높아서 어린 나로서는 올라갈 엄두도 못 낼 산이었다. 그 산비탈 길을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같이 솔잎을 긁어 모아 커다랗게 단을 만들어 이고 내려오시곤 했었다.
엄지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읍내 저자 다 보시고
신작로에 오시지
둘째 아가,
어머니는 어디만큼 오시나?
아기 신발 사 가지고
고개 넘어 오시지
……
내가 쓴,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가의 노래 <어디만큼 오시나>는 나무 간 엄마를 기다리며, 누나와 같이 웅얼대던 어릴 적 내 노래의 개정판에 불과하다.
남편에게 불평을 늘어놓지 않던 아내였고, 수단이 없어 가계를 넉넉히 할 줄도 모르던 아내였으며, 극도로 봉건적인 생각을 가지셨던 어머니는, 아들이 장성함에 따라 물밀 듯 들이닥치는 현대적인 모든 것과 부딪치면서도, 조용하고 허둥대는 일이 없는 어른이었다. 언제나 아들딸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절실한 기원을 부처님께 드리고 계시던 어머니였다.
서울에서 나는 교원 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러한 격동하는 물결 속에서 나는 어머니를 모셔 올 생각도 못 하고, 시골 누님 댁에다 그냥 맡겨 둔 채 몇 해를 지냈다.
학교를 뛰쳐나와 출판사의 일을 보고 있던 나는 시간적으로 급해진 일들 때문에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는 처지였는데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만 있으면 급한 일을 끝낼 수 있기에 하루하루 일에 끌리다가, 드디어 별세하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이만치나 불효한 외동아들이 또 있을까!
부랴부랴 달려갔으나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누이들은 나를 붙들고 소리쳐 우는데, 나는 멍하니 얼빠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야 나는 엎드려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울었다.
기차 소리만 나도 “원수 오나 보아라.”고 하셨다고 했다.
갑작스레 병이 악화된 어머니는 때때로 “원수 안 왔느냐?” “왜 여태 안 오니?”하고 누이들을 못 견디게 들볶았다고 했다.
돌아가실 때가 되어 아들을 보고 싶어 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그 어머니의 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자식 사랑의 마음을 눈물 없이 생각할 수가 없다.
애타게 기다리다 눈을 감으신 어머니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껏해야 일개 회사의 일 때문에 시간을 끌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못 본, 이런 바보 같은 아들은, 울고 또 울어도 자신의 죄를 씻을 길이 없다.
몸집이 작으시던 어머니, 그래도 길을 가면 나는 듯 잘 걸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가신 지도 벌써 20여년. 고향 마산에 나의 동요 <고향의 봄>노래비가 섰을 때, 용마산 그 비에서 바라다 보이는 뒷산에 묻혀 계시던 어머니는, 그래도 나를 생각해 주셨을까.
나는 어머니 무덤에 가서 못난 불효의 자식이라도 시비(詩碑)가 선 걸 멀리 바라보고 좋아해 주시리라 믿고, 무덤 앞에 엎드려 절을 했던 것이다.
철모르던 유년기는 제쳐놓고, 우리는 일평생을 새해를 맞이하는 때마다 무슨 희망이나 포부를 가지고 올해는? 하고 별러왔다. 그러나 대체로 새해의 포부나 희망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고 뜻하지 않은 곤경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이루어진다 해도 예정보다 못한 것이 예사이다.
그러나 설령 새해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러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인생에 대해 애착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생활을, 더 값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해가 오거나 말거나 나 모른다는 사람보다는 훨씬 생활에 대한 의욕이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자기류(自己流-보통과는 다른 자기만의 방식. 자기가 생각해 낸 독특한 방식)로 생각하면서 나는 해마다 새해를 맞이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사업을 계획하고 운영하고 하는 그런 계획이 아니요, 큰 작품을 하나 써 보리라든가, 멋진 책을 하나 내 봐야겠다든가, 하는 남이 볼 때 지극히 사소한 일들에 불과한 것이었다. 새해의 나의 일년지계가 이렇듯 작고 좁은 것이었음은 나의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약하나 자기의 예술에 집착하여 마땅히 해야 할 가정적, 사회적, 국가적 사업에 등한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새해를 맞이할 무렵이면 눈앞에 와 있는 설날보다 지나간 날의 설날들이 더 또렷이 머리에 떠오른다. 거기에는 소년시절의 설날이 있고, 20대, 30대의 설날도 있다. 그런 설날들에는 멀리 눈 덮인 산과 비취같이 파란 하늘과 논귀에 얼어붙은 물과, 아이들의 설빔과, 술에 불그레해진 얼굴들이 있다. 연하장과 새 일기책이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향수처럼 내게 와서 슬쩍 슬쩍 부딪치고는 멀어져갔다.
그러나 요즈음의 새해는 확실히 느낌이 줄어진 것 같다. 나의 연령의 소치일까. 아니면 새해가 너무 자주 오기 때문일까? - 자주 온다는 말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옛날의 일년이 지금의 반년 정도로 느껴지는 나의 감각상의 문제 때문이다.
사실 나의 그러한 심장의 고동까지를 듣지 못한다. 발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요새는 새해마다 과거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나의 생활에 새로운 설계나 구축이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에 묻은 때를 조금씩이라도 씻어 없애야겠다는 일이다. 어리석어서 묻힌 때 심약해서 묻힌 때들 때문에 나 자신은 제 정신을 가지지 못한 인물로 살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요즈음의 나의 걱정이요, 근심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괴로워도 참으면서’
얼핏 보면 제법 처세에 필요한 금언같이 들리기도 하는 이 생활태도가 나를 요렇게 소인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정책과는 의좋은 말일 수 있다. 또 독재 정치 아래서도 무난한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자 하는 민주주의 시대에 이렇게도 무기력한 생활태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건 무슨 경제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들 현대인의 정신면에서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략>
새해 아침의 찬란한 태양은 우리들의 마음에 밝은 희망을 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무리 우울한 일년을 보낸 사람이라도 새해 새 아침의 태양을 우러러보고는 희망의 실마리를 얻은 듯이 느끼게 된다. 그 산봉우리의 흰 눈과 그 위에 찬연히 금빛 화살을 쏘아 보내는 태양을 볼 때, 희망을 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나는 어쩐지 부끄러움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태양은 내게 열과 아름다움을 주어왔지만 새해 새 아침 태양을 바라볼 때,
옛날에는 느끼지 못한 부끄러움을 갖게 된 것은 나의 자책감에서 일 것이다.
겸손한 태도를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동네 뒷산에 올랐다가 좁은 산길에서 지게에 나무를 지고 오는 나무꾼을 만났었다. 앞서 가던 나는 그 나무꾼과 마주쳤을 때 미처 피하지 못했는데, 나무꾼이 무거운 짐을 진 채 길 아래쪽으로 비켜 지나갔다. 뒤에서 이 광경을 본 부친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짐을 지지도 않았는데 어찌 먼저 피해서 나무꾼에게 길을 내 주지 않았느냐?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너에게 길을 비켜 주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느냐? 일하는 사람에게 겸손해야 한다.”
아홉 살 때의 일이지만 그 날의 일을 일생 잊지 못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을 낮춰 보지 말라는 부친의 그 말씀은, 어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정과 이해를 가지고 살게 된 것도 그 말씀 때문이리라 믿어진다.
남의 비밀을 보려 하지 말라
내가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한문 공부에서 새 책을 사려고 아버지께 받은 돈을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었는데, 마침 책이 왔다 해서 사러 가려고 하니 그 때 어머니가 집에 안 계셨다. 외가에 가셨으니 내일에나 오실 것이다. 나는 새 책을 어서 사고 싶어 어머니의 장롱을 뒤져서 그 돈을 찾으려고 했다. 이때 부친이 보시고 크게 꾸짖었다. 어머니가 쓰는 농속을 함부로 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네 어머니의 장롱을 뒤질 수 없는 것이다. 장롱뿐 아니라 무엇이거나 주인이 쓰는 것은 남이 함부로 뒤지는 법이 아니란다. 편지 같은 것도 아무리 부모 형제 사이라 하더라도 몰래 엿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서 책을 사고 싶은데요…….”
하고 내가 보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롱을 열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무안하기도 하고 어서 새 책을 사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남의 물건을 주인 없을 때 뒤져 보는 일이 나쁜 짓이라는 걸 나는 그때 깊이 명심했다. 남의 편지 - 그것이 집안 식구들에게 온 편지라 해도 절대로 받을 사람이 없을 때 떼어 보지 않게 되었다. 이건 예의에 속하는 일이요, 또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돌아가시며 가르쳐주신 어머니의 사랑
내 어머니는 무뚝뚝하시어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더 좋아하였다. 아버지는 말하자면 나를 자유롭게 길러주신 분이어서 크게 호통을 치시거나 매질을 하시거나 한 일이 없으셨다. 그런 부친이 내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되시어 20여년 더 사셨다. 나는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살았는데, 어머니는 서울에 오시지 않고 시골 누님 댁에서 계시다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시다는 편지를 받고 내가 시골 마산으로 내려가려 했는데, 그 때 마침 내가 일보고 있던 출판사에서 교과서를 만들고 있었으므로 일이 매우 급해 그걸 마쳐 놓고 가려고 며칠을 지체했다. 그러다가 별세하셨다는 전보를 받고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불효하기 그지없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누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없이 슬피 울었다. 어머니는 운명하실 때가 가까워지자 동네 뒤로 나 있는 기찻길에서 기적 소리만 나면 내가 오나 하고 기다렸다고 했다.
“원수 아직 안 왔느냐?
고 누이들에게 자꾸만 물었다는 어머니를 두고 나는 그 무슨 회사일에서 떠나 달려오지 못했던가? 어머님에게 대한 효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어버이의 정에 대해서 내가 너무도 무심했던 것 같아 참회의 눈물을 쏟아야 했다.
부모는 자식이 다 커서 어른이 되어도 어릴 때나 다름없는 사랑으로 항상 생각해주고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참으로 뒤늦게 받은 무언의 교혼, 그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가르쳐주신 사랑에 대해서 피맺히는 마음으로 그 어머니를 위해 드리고 싶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생각하니 이 또한 슬플 뿐이다.
내가 가끔 생각하는 학교가 있다. 이건 중∙고등학교에도 관한 일이지만, 특히 초등학교에 더 많은 관계를 가진 나대로의 이상형 학교를 그려 보는 것이다.
첫번째.
‘내가 생각하는 이 학교에서는 첫째 선생과 학생의 사랑으로 맺어진 굳은 연결이 있다’
교사의 태도로서 아이들에게 엄하게 대하거나 다정스럽게 대하거나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과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좀더 강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이 교사 없는 데서 선생을 비난하고 깔보기를 예사로 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아이들의 잘못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 이상을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을 갖는 게 보통인데, 그렇지 못하고 업신여기게까지 된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돈과 권세에 머리를 기웃거리지 않는 청렴한 태도 - 이 점에서 특히 초등학교 교원의 위치는 중요하고 위대한 것이다. 그것은 아동들의 일생에까지 정신적 영향을 끼쳐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믿고 존경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부단한 사도교육이 유형무형으로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두번째.
‘내가 생각하는 이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과목의 공부를 다 같이 중요시한다.’
그것은 자칫하면 등한시하고 힘쓰지 않는 예능교육에 대해서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음악, 미술, 공작 등의 과목에 대한 교육이 부당하게도 홀대를 받지 않는 것은 새로운 수확이 아니라,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음에 불과하다.
예능과의 중시는 결코 천재적인 아동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골고루 가르쳐서 그들의 정서를 아름답게 해 주어야 하겠다.
정서 교육의 무시에서 빚어진 사회적 결과는 무서운 것이 있다. 누구나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정서 교육으로써 그러한 무서운 결과를 미리 없앨 수 있고, 또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또 국어과에서 작문 교육에 주력한다. 편지를 쓰지 못하고 자기의 감정을 그려 낼 줄 모르는 졸업생을 내는 학교는 사회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세번째.
‘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독서를 지도한다.’
독서의 지도라는 것은 교과 공부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근래 학동들이 무엇을 읽고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어떤 책을 읽혀야 하겠는가를 연구하는 태도까지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덮어놓고 교과서 이외의 책을 읽지 말라는 선생까지도 있고, 혹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도록 숙제를 주는 선생도 있다. 어릴 때 독서의 버릇을 기르지 못하면 커서도 희망이 없다. 만일에라도 초등학교에서 독서 안하는 버릇을 길러 주기를 성공하였다면-, 그 학생은 교과서를 배우려다가 일생의 손해를 본 셈이 될 지도 모른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아동들은 읽으려 든다. 지도에 철저하지 못해서 오히려 나쁜 결과가 나타나기도 쉬우니, 즉 좋지 못한 책을 읽게 되기 쉬운 까닭이다.
학급 도서관을 만들었는가? 매월 몇 권의 신간 서적을 샀는가? 그것을 계산 해보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글을 실으면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생도를 학생으로 고쳤습니다.
어린이들아! 너희들의 달 5월이다. 나뭇잎은 새로이 피어나 향기로운 바람 속에 하늘거리고 들에는 푸른 보리가 윤기 나는 물결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핀 잎과 쑥쑥 자라는 풀과 피는 꽃, 맺는 열매들처럼 너희들은 새롭고 무성히 자라는 사람으로서의 새잎이요, 꽃이요, 갓맺은 열매다.
여기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스스로 잘 자라기 위해, 잘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부탁하고 싶다. 첫째 어린이들은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장난치며 즐겁게 지내라. 풀밭이나 흙땅에서 놀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편한 옷을 입어야 한다. 혹시 부모님들이 값비싼 옷을 입혀 주어 놀기에 불편할 때에는 놀기에 편한 옷을 달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학교 갈 때도 마찬가지다. 잘 차려 입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지 마라. 사치라는 걸 제일 부끄러운 일로 알아야 한다.
둘째,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라.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즐거이 하는 사람이 되자. 집안 청소나 학교에서의 청소 같은 것은 우리들에게 일하는 버릇을 기르는 데 좋은 기회가 된다. 교실 청소를 할 때 귀찮아하는 생각이나 힘드는 일을 남에게 하게하고 나는 편하게 지내려는 어린이가 있다.
학교 가고 오는 길에서도 자기의 책가방이나 짐을 다른 아이에게 맡기는 얌체 어린이도 있다. 자기의 힘이나 세력을 앞세워 남에게 내가 할 일을 시키는 어린이는 자라서도 그 버릇 때문에 옳지 못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집안 식구의 구두를 닦는다든지, 더러운 데를 깨끗이 청소한다든지 하는 일은 나 자신을 닦는 일이나 다름없다.
셋째, 남의 권리를 뺏지 말자. 가장 작은 일을 예로 들어 보겠다. 버스나 기차를 탈 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슬쩍 새치기를 하여 서서 기다리는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타는 사람들이 있다. 어린이들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며, 어른이 혹시 같이 새치기를 하려 하더라도 단연코 듣지 말라. 이 조그만 일이 곧 남의 권리를 훔치는 일이요. 부정한 인간이 되는 첫걸음이다.
넷째, 남과 정답게 지내자. 친구와 정답게 지내는 일은 나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남의 사정을 이해해 주려 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두 정답게 지낼 수 있으면 이 세상은 즐거운 곳이 된다. 사랑의 마음은 우리들의 친구나 이웃에만 가질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에게까지도 뻗쳐야 한다. 작은 새 한 마리에도 한 그루의 나무에도 그들의 생명이 있다. 그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마음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책을 읽으며 자라라. 한 권의 책은, 그것이 옛날 사람의 전기이거나 문학 작품이거나, 그걸 읽음으로 해서 그 책 속의 인물이나 작품을 쓴 사람의 마음과 서로 이어져서 세상의 옳은 것, 좋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달라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정신에 있어서는 판연히 다르다.
이상 몇 가지를 어린이들에게 부탁하면서 우리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어린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음을 깨닫고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어린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새로 해야 할 일뿐 아니라, 여태 해오는 일에 바로 잡아야 할 것도 수없이 많은 것이다.
‘어린이 달’
5월에 어린이를 위해 큰 결심과 과단성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빗소리는 아침 잠자리에서는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들은 것이었으나 그 소리는 이내 그쳐 버리고 내가 거리에 났을 때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이 말 아니게 나빴다. 골라 다닐 데도 없다. 응달에 쌓였던 시커메진 눈이랑 흙 섞인 얼음들이 일제히 녹아 골목에 범람한 것이다.
그러나 추위라는 걸 잊어버리게 된 것만 해도 봄인 게 틀림없고 게다가 비마저 확실히 봄비였다.
이런 비 오는 날은 우산을 가볍게 받고 들길 신작로를 거닐고 싶다. 질퍽거리는 길이 아닌 깨끗한 길을 안개비에 흐린 산천과 누른 잔디풀에 새싹이 돋을 것 같은 언덕을 바라보면서 한가로이 거닐고 싶다.
항상 빠르던 내 걸음걸이의 속도를 아주 낮추어 어슬렁어슬렁 걸을 것이다. 이야기 - 그것도 속세 실무와 인연 없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있으면 비 오는 길은 십 리든 이십 리든 멀수록 좋은 것이다. 가다가 날이 저물어도 비 젖는 어둠 속에 이야기는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니 교외가 그립다. 도시의 곤죽 같은 길은,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이 좋은 봄의 첫 시절을 택시들이 흙물을 튀기며 지나가는 걸 보면 차만이 아니라, 그 안에 탄 사람까지 미워진다.
얼었던 흙이 녹아 땅 속 깊이 스며드는 봄비는 머잖아 눈부신 연둣빛의 살찐 수선화 이파리가 검은 흙덩이를 밀고 올라오게 할 것이다. 그런 생명의 약동은 봄이 주는 경이(驚異)의 기쁨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이러한 자연의 미는, 한 평의 뜰도 없는 사람에겐 미쳐 느낄 도리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종로 거리의 저 빈약한 수양버들, 그 잎이 아직 피지 않아도 줄거리의 색채가 어딘지 모르게 푸르러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나에게 봄의 소식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새맑지 않은 하늘과 토우(土雨) 끼인 대기가 봄의 탄생을 말해 준다.
부드러운 바람에 전차가 달려온다. 그 전차에 깃발이 펄럭거린다.
‘아 봄이 왔구나. 전차에 깃발이 펄럭거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그 펄렁대는 기(旗)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건 사시장철 달고 다니는 때 묻은 교통안전의 기이다. 그러나 봄을 느끼는 눈에는 그 기가 마치 봄이 왔다는……, 봄바람이 분다는 신호기인 듯이 보인다. 그런 전차는 말 할 수 없는 즐거움을 싣고 달리는 것으로도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두 온화한 마음으로 바꿔 가진 것 같이 보인다. 주고받는 얘기 속에 즐거움이 풍긴다. 생활의 괴로움이나 슬픈 사연 같은 건 잠깐 마음 밑창에 간직해 버리고 그저 경쾌해진다.
생화를 파는 가게 진열장을 우두커니 들여다보고 싶다. 따슨 햇볕에 메이지, 프리뮬러 등이 더워서 오히려 시드는 것 같다.
어느 젖은 흑색 양토의 언덕을 넘어가다가 달고 새큼한 향기에 놀라 무언가 하고 두리번거리며 바로 가까이 히아신스의 꽃밭이 있던, 그런 어릴 적의 추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봄의 진정한 기쁨은 온갖 꽃이 만발하는 4,5월에서보다 3월에 있는 것 같다.
잎 피지 않은 수양버들이나 전차의 기폭이나 밤하늘 희미한 볕에서 느끼는 봄……. 이런 것들이 진정 더 청신한 봄의 감각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한 앳되고 새로운 계절의 감각 속에서 인간에게도 앳되고 순진한 애정이 싹 돋을 수 있으면, 우리 가슴에 지극히 아름다운 꿈같은 행복을 지닐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그건 무르익은 성화시(聖花時)의 행복이 아니라, 실로 속되지 않은, 괴롭고 떨리고 한숨마저 뒤섞인 소년다운 사랑으로써 이 3월을 장식하며 만 가지 꽃을 대신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아! 정말 봄이라 쓴 기가 아니라도 좋다. 때 묻은 교통안전의 기가 펄럭이는 전차를 타고 윙윙 거리를 다니고 싶다. 이슬비에 우산을 받고 교외의 길을 조용조용 거닐고 싶다. 동화를 쓰다가 얻은 내 어느 작품의 옥이라는 소녀가 나를 따라다니며 현악기의 음과 같은 부드러운 소리로 아름다운 얘기를 해 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내 오랜 겨울을 우울에서 항상 서럽던 마음이, 모조리 불같은 사랑으로 변하여 그 아이 하나에게로 찬연한 양광(陽光-따뜻한 빛) 처럼 쏟아질 것만 같다.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한 마리의 작은 새가 있다. 노란 빛깔의 날개, 쉴 새 없이 간들거리는 꼬리, 좁쌀같이 작은 눈. 작은 새는 무슨 즐거움을 노래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 작은 새는 제 즐거움의 한 순간에서 급전 직하 죽음의 낙하를 했다. 저를 겨냥한 공기총의 탄환을 받은 것이다.
총을 쏜 사수가 쾌재를 부른다. 그리고 죽어 떨어진 작은 새를 보고 지나가던 한 소녀가 마음 속에 아픔을 간직한다.
장면을 바꿔 한 소년을 본다. 밤이 깊었는데도 책상에 붙어 앉아 중얼중얼 글 외기에 여념이 없는 소년은, 생기 없는 안색으로 졸음을 못 견디어 양미간이 자꾸 찌푸려진다.
그러나 소년은 자리에 눕지 못하고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열 두 살의 소년은 지금 우주와 사회 구조와 동식물에 대한 갖은 지식, 알쏭달쏭한 언어의 비교, 어구의 해석…… 산더미같이 많은 공부의 짐에 지쳐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다.
“그만 자거라.”
하고 타이르는 부모, 혹은 커피나 과자를 주며 잠을 쫓게 해 주는 부모. 입시 준비 공부의 살을 깎는 정경이다.
한 마리의 작은 새를 귀여워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시대에 맞지 않는 감상이라고 비웃을 것인가. 그리고 한갓 유희에 불과한 짓으로 작은 새의 생명을 뺏고 사격의 솜씨를 기뻐하는 것을 건전한자의 마음이라고 옹호할 것인가.
또 지나친 학습에 몸이 야위고 정신이 시드는 어린이들을 보고,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라 하며 방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아니, 오히려 이러한 사태에서 어린이들에게 지나친 공부를 더욱 채찍질하는 교사나 부형(父兄)의 마음은 어디에 기반을 둔 것일까.
현대는 기계 문명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인간이기보다 하나의 기계로 변화해 가는 듯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현대에 있어서는 기계를 만들어 내어 그것을 부려 인간의 복을 누리려 하는 것이지, 인간 자신이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이 기계와 같아질 때, 반드시 그 인간은 기계의 지배를 받는 불행을 짊어지게 되지 않겠는가.
인간의 높음은 기계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는 데 있다. 기계를 지배하는 힘은 모든 행동의 옳고 그름을 가려 옳은 일을 해 나가고 그른 일을 아니 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을 가지는 데서 얻어질 것이다.
인간이 어린 생명을 죽임에 있어 그 방법의 교묘함이나 정확에만 정신이 팔린다거나, 어린이들을 암기 기계화하는 커다란 폐단을 교육 자체에서 막아 내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전도(前途-나아갈 길)는 적이 암담하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도덕, 정서의 교육이 크게 중시되어야 할 우리들의 어린이들에게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그들의 어깨에 짐 지워 놓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생명의 존귀함을 뼛속 깊이 알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한 마리의 새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값싼 감상이라고 한다면 그 감상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겠다. 아직 철없이 뛰놀며 자라야 할 어린이들에게 신통치도 않은 지식을 주입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공부보다 이웃을 사랑하고 동포를 위하여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공부에 치중해야 우리의 앞날도 밝아질 것이다.
자주성이나 주체성이 없는 오락적인 모든 가짜 문화에서 어린이를 구해야 하겠다.
지식 우선, 기계화 우선의 풍조에서 어린이를 구해야 하겠다. 그러나 지식과 기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그것들을 부릴 인간다운 머리--정신부터 길러 주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오늘의 어린이들에게 진실과 꿈을 주는 일은 중요하다. 그 방법의 하나로 필자는 항상 그들에게 좋은 문학을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문학을 모르고 자란 아동은 두렵다. 더구나 요즈음과 같은 살벌한 세대에 자라는 어린이로서 문학 없이 청년이 되는 것은 너무나 걱정스런 일이요, 낙망적인 전망을 갖게 하는 일이다.
문학은 어린이로 하여금 인간 기계화를 촉진시키지 않을 것이요, 악랄한 생활 방법이나 이기적 간계(奸計-꾀를 구하는 것)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만치 아동 문학은 실리주의나 이기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4월입니다.
4월은 정히 초목이 눈뜨는 달이요, 소생의 달입니다.
4월엔 식목을 합니다. 메마른 땅을 아름다운 땅으로 하기 위해서, 또 가물 때의 물을 얻기 위해서, 혹은 재목을 얻기 위해서 …….
그렇지만 나무를 심고 키우는 즐거움을 알기 전에는 어떤 이익이나 필요성을 들고 식목을 장려한다 해도 별스런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뜰에서 어쩌다 피어나는 조그만 풀 한 포기를 보아도 그 생명이 자라는 모습이 귀엽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진정 나무를 심고 가꿀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동양의 모든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초목과 가까이 하며 살아왔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수렵 민족으로 동물을 잡아먹고 살아온 데 비해서, 우리들은 식물을 먹고 살아온 만치 유순하고 사색적인 인간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창과 칼을 음식 먹는 상에까지 올려놓는데 비해서, 우리들은 나이프나 포오크가 아닌 저와 숟가락을 음식상에 올려놓습니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 먹는 것이 아니라 술로 뜨고 저로 집어 먹습니다.
이렇게 풀과 나물과 열매로 살아오는 우리들이 어찌하여 그 풀과 나무를 사랑하는데 이렇게도 무관심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무관심의 정도를 넘어서, 풀을 밟아죽이고 나무를 꺾어 죽이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동양의 미덕이 날로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잘못 들이마신 서양 풍조 때문일까요.
서양의 것을 본받아도 제대로 본받으면 우리의 생활을 풍부히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흉내 내는 경망스런 마음이 우리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변화를 동화적으로 말한다면, 남의 무기를 빌어들고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풀과 꽃들을 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이프나 포오크로 동물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공격해오지 않는 조용한 수목들을 때리고 자르고 합니다. 돈키호테적인 행동입니다.
거리에서 들리는 음악도 그러한 돈키호테적인 움직임에 맞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전통적인 멜로디를 밀쳐 버리고, 육식을 주로 하는 서양인들의 그 주체하지 못해 뒤흔드는 광란하는 춤에 맞는 음악들입니다.
가꿔 주는 주인이 없어 헐벗은 산야에서 야윈 자태로 서 있는 나무들이, 우리들을 바라보고 쓴 웃음을 짓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모르고 헛된 바람에 들뜬 우리들이 언제 정신이 나서 나무에게로 되돌아올까……. 하고 탄식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우리 모두 한 그루의 나무 한포기의 작은 꽃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좋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앞 다리를 건너서기만 하면 어둠 속에 혹은 은은한 달빛 속에 거꾸로 올라가는 빗줄기처럼 무수히 울어 올리는 개구리들의 합창소리를 듣는다. 큰길 좌우에 있는 무논에 있는 개구리들이겠으나 그 소리를 들을 때는 웬 개구리들이 저다지도 많으며, 그것들이 무엇을 어쩌자고 저렇게도 소리치고 있는가?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 개구리들의 대합창은 앞으로 한여름 가을까지 두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나 같은 변두리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자연에게서 받은 행복의 하나라고 생각하련다.
개구리는 우리와 친한 동물이다. 무슨 특이한 인연이 없으면서도 개구리와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처럼 느끼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팔짝팔짝 뛰는 논가의 개구리. 나뭇잎에 달라붙는 초록빛의 청개구리. 만지면 어쩐지 징그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귀여움이 있어서 개구리는 언제 보아도 좋다.
쭈룩 불거진 두 눈이나 넙죽한 입, 입안에서 번개같이 번뜩 나와 벌레를 잡아 삼키는 혀! 앉아 있는가 하면 장거리를 자리를 가릴 바 없이 홀딱 뛰어가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가만히 앉아있는 그 민첩하고도 유유한 행동. 더구나 아무리 보아도 내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는 짐승일 것 같다.
그러나 더욱 사랑스러워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개구리들이 무논에 수백 마리가 앉아서 머리를 물밖에 내놓고 괙괙 괙괙 울고 있다. 그 우는 소리가,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있다. 개구리의 소리는 개굴개굴 하는 줄 알지만 개굴개굴 하는 소리로 들리는 수는 극히 드물다. 대개가 괙괙 괙괙 하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꾸룩 꾸룩 하는 놈도 있고 왝왝 하는 듯한 놈도 있다.
그런 여러 가지 소리가 한데 어울려서 밤공기 속에 이루어 놓는 교향악은 바로 주룩 내리는 빗줄기처럼, 논바닥에서 하늘을 향하여 거꾸로 또한 줄줄이 치올라가며 우리의 마음을 고요한 가운데 흔들어 주는 것이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 은연중에 생각나는 것이 많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면 으레 개구리 소리 요란한 박꽃 피는 밤을 생각할 것이다. 저녁이 되어 어디서 밀려왔는지 모르게 회색 어둠이 산기슭 동네를 둘러싸면, 앞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피는 하이얀 박꽃. 밝은 낮에 피어 태양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고 어둠 속에 피어 그 하얀 얼굴로 밤의 품에 안기어 스스로 만족해하는 박꽃들이 희미하게 어리어 보이는 돌담 혹은 초가지붕이 있고 그런 마을에 목 놓아 노래 부르는 개구리들의 소리는 밤이 깊어서 사람들이 다 잠들어도 그치질 않는다. 밤이 새기까지 울려는 게 아니라 아주 목이 꽉 쉴 때까지 소리 높여 우는 것인가 싶다.
바람 한 점 없는 밤. 우러러 보면 하늘에 은하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개구리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애타게 우는 것일까……. 하고 생가해 보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 나는 개구리가 운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슬프고 괴로워서 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운다는 말과, 우는 말과는 정반대의 말인 노래 부른다는 말을 뒤섞어 쓰고 있는 것이다.
개구리뿐 아니라 조류에 속하는 모든 짐승에 대해서도 그렇다. 새가 운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또 노래 부른다고도 한다. 우는 것과 노래 부른다는 두 가지 말을 혼동해 쓰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이 하나의 사물을 보고 너무 지나치게 느낀 까닭일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그것을 표현할 말이 부족한 탓일까.
개구리나 새들의 우는 소리는, 저희들끼리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우리들과 같이 발달된 언어를 가지진 못할망정 저희끼리의 의사를 나타내어 알리는 이야기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제 동무를 찾으려는 신호와도 같은 것, 그것은 울음도 아니요. 노래도 아닌 그들의 생리적인 욕구를 위한 발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노래로 혹은 울음으로 우리대로의 기분에 따라서 이렇게도 듣고 저렇게도 듣는다. 개구리들의 소리는 아름다운 소리가 되지 못하여 새소리를 따를 길 없으나 그 기성에 가까운 개구리 소리도 밤하늘에 일대 합창을 솟아 올릴 때는 시끄러울 정도의 그 울음소리가 먼 향수 같은 것조차 풍겨주면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모심기를 해 놓은 논에서 개구리들의 합창이 들려오는 밤, 벼들은 밤이슬 먹으며 부지런히 자라고 있고, 먼뎃집 들창에 불빛이 비쳐 있는가 하면, 논 언덕에는 달맞이꽃들이 피어 어둠 속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수줍은 여인처럼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흐려졌다 한다. 달맞이꽃도 박꽃처럼 저녁이면 피어 개구리 소리 들리는 언덕에서 이슬에 젖으며 밤을 새운다.
아, 여름밤은 그래서 사람들도 이슬에 옷 젖는 줄 모르고 별빛 찬란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즐겨 거니는 것인가 보다. 여름밤 개구리 소리는 아무래도 아름다운 정취의 하나로 쳐 주어야 할 것 같다.
세상에 가난처럼 흔한 것도 없고, 또 가난처럼 아픈 것도 없다. 가난의 아픔은 육신을 마르게 하고 고달프게 하며 행색을 추하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도 한다.
그것은 흔히 젊을 때의 수학의 길을 막고, 문화 사회에의 진출을 어렵게 만들며, 때로는 비뚤어진 인생관을 갖게 하여, 타락의 구렁으로 사람을 끌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괴물인 가난 속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속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고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다.
나는 7, 8세의 어릴 적, 부친이 목수 일을 하고 있는 어느 부잣집에 가서 부친의 상에 곁들여 차려 주는 점심밥을 얻어먹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높은 산에 가서 솔개비를 긁어모아 이고 오곤 하던 모친을 기억하고 있다.
소학 시절 월사금을 내지 못해 공부를 하다 말고 쫓겨나 집으로 오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의 이 가난의 기억을 버리고 가난에서 풀려 난 젊은 날이나 편안한 늙은 날을 갖지 못하고 사는 나는, 남에게서 무능자로 보이기에 알맞은 한 표본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가난에 죄 없음을 깨달았고, 죄 없는 나의 가난에 대해서 원망도 슬픔도 갖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죄 없는 나의 가난에 조금이라도 비굴이나 불의나 부정으로서 대항하지 않는 것을 내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 천연의 동심으로 아동들을 위한 문학을 하기 위해서도 그것은 오히려 필요한 생활 태도임을 확신했다.
나는 내가 배우고 싶은 학문에 대해서, 전문적인 학교에 못 간 대신 젊은 날을 독력으로 배우고 일에 몰두했다. 예술, 문학, 역사, 경제학의 여러 서적들은 나의 스승이었고, 나의 길잡이이기도 했다.
의식을 위한 직장 생활은 성실히 했다. 다만 승진이나 승격에 마음 쓰지 않았을 뿐, 맡은 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 가난을 얕보고 내게 추파를 던져 온 온갖 유혹을 나는 완고하게 물리쳤다.
아동 문학을 한다는 나의 자긍을 시들리지 않기 위해서도 나는 인문 일체란 걸 굳게 믿고, 내가 쓰는 글은 나라는 생각에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우직하다고 할 내 생활 태도를 그대로 지니고 문학을 한다.
세상이 날로 야박해져 가고, 교활한 사람들이 불어나서 활개를 치며 설친다. 그래도 좋은 것이다. 동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마저 하나 둘 떠나 버린다. 지난날의 맑은 정신을 다 잊어버린 듯, 시류에 따라 흐르며 유유하다. 내 곁이 쓸쓸할이만치 적막해진다. 그래도 좋은 것이다. 나는 적막한 걸 오히려 나의 승리, 나의 불변의 결실로 보며 안심한다.
빈마가 뒤에서 나를 보고 냉소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빈마에게도 미소로써 정시할 수 있다. 그는 나를 지켜 준 수호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고 보면 나는 시련을 거쳐 그걸 극복했다기보다 그 시련 속에 정주하고 있다고 할 것 같다. 그 시련 속에서 문학을 하고 인생을 배우며 살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것도 오히려 즐거움 마음으로.
‘요즈음 건강은 좋으십니까?’
한동안 못 만난 친구나 후배들이 내게 이런 인사를 할 때면 나는 약간 당황하면서, 또 얼마쯤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별일 없습니다.’고 대꾸한다. 여전히 마른 몸으로 내가 건강하다고 대답하기가 좀 어색하기 때문이지만 사실 큰 병을 앓은 일이 없고 어쩌다 몸살을 앓는 정도이고, 혹시 내부에 들어 있는 나도 모르는 병이 있는지는 몰라도 자각하지 못하는 이상 건강을 못 내세울 것도 없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은근히 생각하는 건, 내 육신의 건강보다 내 마음의 건강에 대한 일이다. 정신적 건강이란 것이 육체의 건강을 떠나서 완전히 존재할 수 있는지 그건 잘라 말할 학문적 근거를 내세우지 못한다.
그러나 어엿한 체구를 하고서도 늘 불안과 우울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이 내 주위에도 있다. 그 분들이 불안과 우울로 지내는 것이, 오늘날 사회의 여러 가지 결함을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면, 나는 일종의 불감증에 걸려 있는 무딘 사람이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말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로서는 사회의 불안한 상태나 결함 때문에 내가 병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에 결함이 있어 우리들의 생활이 불행해질 때에는 그 결함을 제거하는 작업이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라서 감히 손대기 어렵다고 한다면 그 어려움에 부딪칠 힘과 용기를 기르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은 지성을 가졌다면서도 용기에 무척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지만 옳은 지성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싶다.
나도 소위 우울증이란 것에 대해서 약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이십대 시절,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이 뜨일 때면 무언지 모르는 실망감, 고독감에 사로잡혀 염세의 기분이 되곤 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찾아보아도 세상에 하나도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다고 느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이래선 안 된다 생각하고 애써 즐거운 일을 찾아보려고 온갖 궁리를 다했다. 그러나 즐거운 재료가 될 일이라곤 없었다. 너무나 너무나 바랄 것 없는 세상이요, 그날그날이라는 생각이 들 분이었다.
그건 한때의 정신쇠약이었다고 그 후에 느꼈지만, 나는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장만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청년 시절의 일시적인 그런 심적 병이 아닌 - 말하자면 고질로 굳어진 절망감으로 지내는 친구들의 정신적 질환에 대해서 의사가 아닌 내가 생각하는 치료 방안이다.
나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권해 보았다.
“좀더 좀더 아래쪽으로 내려서라.”고.
내 자신이 서민의 한 사람이면서 스스로 특출한 곳에 사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거기 따르지 못하는 모든 조건 때문에 얼마나 우리들은 괴로워했던가. 모든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서민적 냄새 풍기는 밑바닥으로 내려서서, 거기서 우리들의 갈 길을 찾아보자고 했다.
예술도 정치도 경제도 서민과 떨어져서는 옳은 것으로 될 수 없다. 동포나 인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그들을 우중(愚衆-어리석은 대중)으로 여기고 자기만의 기쁨과 행복을 노래하고 자기만의 만족으로 작품을 쓰는 일이나, 애국보다도 이기적인 권세만을 위해 정치를 하거나, 시민의 노력을 빼앗아 치부를 꿈꾸는 영리를 꾀하거나 하는 짓은 진정한 예술도 정치도 경제도 아니다.
고고를 즐기던 사람, 고자세로 지내던 사람, 남을 억누르며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허무와 고독에 자기의 머리를 찧고 괴로워할 날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다. 서민적인 인간의 행복은 사실 고로 이상의 값진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정신적 건강은 거기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플라타너스
가을이 오면 맑은 하늘 아래 단풍 드는 산, 그리고 오곡이 익는 들판이 모두가 보고 싶은 것이지만, 그날그날을 분주히 지내는 사람은 길거리에서나마 가을을 느끼고 또 그것을 즐긴다.
보도 - 그것도 사각형의 돌이나 시멘트 돌을 정연히 깔아 놓은 길, 예를 들자면 서울의 태평로 덕수궁 높은 담장을 끼고 가는 그런 길을 거닐면 가로수의 플라타너스가 던져 주는 양광(陽光)과 음영(陰影)의 묘한 어울림에 내 눈이 황홀해 진다.
발로 밟고 가는 플라타너스의 그림자, 그림자라기보다 그 그림자 속에서 아른거리는 동그란 햇볕들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두워 보이기까지 하는 플라타너스의 짙은 그늘 속에 자꾸만 동글려 하면서 몸부림치는 가을 햇볕은 마치 즐거운 원무(圓舞)를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사라질까 두려운 무슨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볕이 정다웁기도 하고 그늘이 사늘하여 즐거웁기도 한 플라타너스는 이제부터 바람에 불려 낙엽 지기 시작한다.
여름 동안 무성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날 아름다운 볕과 그늘의 춤을 보여 준 이 나무의 잎사귀들이 떨어져 굴러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 내며 길에 떨어진 나뭇잎은 바람에 날려 몇 걸음 굴러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 내며 길에 떨어진 나뭇잎은 바람에 날려 몇 걸음 굴러 가다가 어느 어린아이의 발에 밟힌다.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은 은은한 음향이 들린다. 그리고는 다시 굴러간다. 아이들의 즐거운 발걸음이 지나가고 나면 낙엽은 다시 무심한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다가 어느 조용한 길모퉁이에 엎드려 쉬고 있다.
이러한 광경은 앞으로 얼마 동안을 두고 길거리에서 숱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의 미(美)를 즐기는 냉정한 사람들의 관망 속에서 그것들은 흙 속에 묻히고 혹은 불 태워져서 연기와 재가 되어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플타타너스의 잎새를 보고 있으면 내 눈앞에는 내년 봄 다시 잎이 피고 그 잎이 자라서 가지마다에 매달려 손짓을 할 새로운 잎사귀들을 생각하게 된다.
대지에 묻히고 또는 재가 될 저 낙엽들이 반드시 내년엔 다시 되살아나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손짓해줄 것을 웬일인지 내가 굳이 믿으려 드는 것이다.
낙엽 쓸기
집안에 큰 나무가 있으면 가을에는 그 잎들이 떨어져서 날마다 뜰에 깔리는 낙엽을 쓸기에 바쁜 것이다. 은행이나 포플러 같은 나무는 잎이 질 때면 온통 뜰을 덮는다. 그러나 그런 낙엽을 쓸기란 힘이 들지라도 싫은 일은 아닐 성 싶다.
쓸 겨를이 없으면 그냥 두고 보아도 좋을 것이 아닌가? 뜰에 내려앉은 노란 잎사귀 빨간 잎사귀들은 그것대로 하나의 화초다운 것이다. 그것들을 귀찮아 할 까닭이 없고 그것들을 쓸어 모으는 일이나 쓸어 모아 불태우며 혹은 흙에 파묻는 일은 하나의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지다.
살아가는 것들의 운명을 눈으로 보고 그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처리해 주는 일이기 때문에 낙엽을 쓸어 모으는 일은 조용한 사색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가로수가 무성한 큰 길에서 가을이면 날마다 비질을 하여 낙엽을 쓸어 모으는 노인을 보았다. 그 노인은 자기 집 뜰이 아닌 큰 길의 낙엽을 모으고 있는 청소 인부이다.
낙엽을 쓸어 모아도 쓸어 모아도 자꾸만 떨어진다.
아침저녁으로 청소를 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자꾸만 떨어진다.
나는 철없는 생각에 이런 공상을 해 보았다.
‘저 노인에게는 가로수의 낙엽이 얼마나 귀찮은 것일까?
어쩌면 저 노인은 가로수의 잎이 가을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는 나무였으면……, 하고 속으로 원할는지도 모른다.
그 노인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가로수의 잎사귀들은 가을에는 길에 굴러다니지 않게 되어 노인은 매일같이 그 낙엽을 쓸어 모으는 일을 아니 해도 좋게 되었다.
어느 날 그 노인은 실업자가 되어 잎이 떨어지지 않는 그 깨끗한 길로 어설프게 걸어가고 있었다. ‘
눈앞을 스쳐가는 짤막한 공상,
오! 낙엽이여! 떨어져 흩날리라.
그 속을 우리는 거닐고 싶다.
길이 정 어지러워지면 늙은 영감님이 비를 들고 나오실 것이다.
‘내게는 선생님이 없다.’
이런 말을 하는 어린이는 없겠지요.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로서 선생님이 없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선생님을 갖지 못한 어린이들이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 학생이 어디 있으려고’
‘선생님 없는 학교도 있다?’
하고 말할 어린이들이 많겠지만 선생님 없는 학생이 요즈음 꽤 많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이라고 했지만 사실 요새만 그런 건 아닙니다. 벌써 수십 년 전인 내가 어릴 때에도 있었습니다. 내 어릴 때 같은 반의 친구 한 아이는 선생님에게 대해서 별나게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은 학생 자신이 선생님보다 잘나고 학문이나 예의에 대해서 더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배울 생각이 없고 철없이 교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학생은 학교 선생님을 아무개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눈딱부리니, 콩나물이니 하는 별명으로 부르거나 어쩌다 선생님이라 할 때에도 ‘…선생님’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 부르기 쉬운 ‘님’이란 한 마디를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생님이나 윗사람에게 건방지던 그 학생의 공부 성적은 형편없이 나빴을 뿐 아니라, 반 친구들도 귀찮아하는 존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될 수 있었을까요? 자기를 가르쳐 주는 이 조차 싫어하던 사람이 어른이 된다 해도 자기보다 잘난 사람, 자기보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을 본받으려 하지도 않고 항상 자기가 잘난 체하며 살았을 것이나 참 딱한 일입니다.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려 들지 않고, 가르쳐 주는 이를 선생님으로 존경하지 않는 학생은 결국 선생님을 갖지 못한 학생입니다. 몇 해 동안 학교를 다녀도 그런 학생은 헛공부를 하는 셈이 됩니다. 마음속에 존경하며 따를 선생님을 못 가진 학생은 외롭고 가엾은 학생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어린이들 중에 조금 나이가 많아지고 학년이 높아지면 선생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린이가 있는 걸 봅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그런 학생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건 대단히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순박하고 진실되지 못하고 쓸데없이 악해지는 것, 어른처럼 때 묻은 사람의 흉내를 내려는 것, 돈이나 재물로 잘 사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욕심쟁이가 되는 것, 이런 것은 다 옳지 못한 짓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들의 세상은 누추하고 살맛 없는 세상이 됩니다. 이런 생활에 빠지면 빠질수록 선생님을 얕보고 바른 교육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이 세상의 참된 행복, 참된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중에 선생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존경하지 않는 친구가 있거든, 그런 생각, 그런 행실을 버리도록 타일러 주십시오. 그래서 어린이들이 참된 공부를 하게 되고, 참된 도의심을 길러 가야 우리의 앞날이 더욱 빛나고 즐거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나에게는 몇 분의 스승이 있는가를…….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스승이 없다면 그건 큰 불행입니다. 스승 없이 하는 공부는 값있는 공부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도 참된 사람이 되는 공부가 되지 못하니 노력해도 헛일이 되고 맙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스승을 가집시다. 학교에서 뿐 아니라 이웃에서, 사회에서, 존경하며 따를 선생님을, 되도록 많이 우리들 속에 모실 수 있으면 우선 우리는 큰 복을 받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8·15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에는 애국자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거리거리에 떠드는 소리가 모두 애국이요, 사람마다 애국을 부르짖었다. 나라 안에 온통 애국자 투성이가 된 것 같았다.
36년 동안 남의 나라에 얽매여 신음하던 백성들이 오죽이나 해방을 반겼으랴, 오죽이나 내 나라를 세우고 떳떳이 살고 싶었으랴.
그러나 애국자가 갑자기 쏟아져 나와서 주체를 못하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우리나라는 두 동강이가 되고, 게다가 곳곳에서 정치의 싸움이 벌어져 애국을 부르짖으며 부모 형제에게 주먹과 총칼을 들이대었다.
어린이들아! 나는 진정 말한다.
그러한 애국자들이 곧 너희들의 아버지요, 형제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애국자들이었건만 너희들은 불행했다. 복된 나라의 어린이가 되지 못하고, 너희들은 편히 공부하고 즐겁게 뛰놀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그 말만치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지는 못 했던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어린 너희들의 속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어른들은 일본 사람들의 교육을 받아왔고 그 교육에서 나쁜 점을 버리려 했으나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버린 것이 많다. 또 살기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비루해지고, 약해져서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깨끗한 생각으로 아직도 많은 물과 같이 자라는 중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좋은 국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어린이들은 배우고 힘써야 할 것이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인가? 어린이들이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첫걸음은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동무 내 동네 사람들을 우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애국이냐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정말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길에 버려진 큰 돌멩이나 유리조각을 집어 치울 수 있는가?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해가 끼쳐질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치움으로 해서 많은 사람을 위하는 일이 된다.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붙들고 달래 줄 수 있는가? 전차나 자동차를 탈 때 남의 앞으로 가서 새치기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동정할 수 있는가? 내가 노력한 만치의 이익을 얻고, 그 이상의 이익을 탐내어 남의 것을 뺏으려 아니 할 수 있는가? 남의 이익을 뺏는 것은 하나의 죄가 된다.
우리나라가 훌륭한 나라가 되려면 우리들이 모두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없어야 하고, 남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하고, 우선 이웃과 온 동네와,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사람 전체를 위하여 지나친 자기 욕심 때문에 남을 해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애국이란 반드시 총칼을 메고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로 나가는 것만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 잘 살려는 욕심보다, 다 같이 정답게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야 그 나라는 좋은 나라가 되고, 그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애국심이 있는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애국자라는 것은 공연히 남이 나라를 미워하는 것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옳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란 것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애국자라고 떠들고 나서는 일이 없이 그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노력하고 나 하나만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