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메이커 2014.3.14 이원수문학관'이원수최순애 시그림 및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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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169회 작성일 15-04-16 11:49본문
2014년 3월 14일(금)은 최순애 선생님이 태어나신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맞아서 이원수문학관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 중 하나로 3월 14일(금)부터 30일(일)까지 이원수, 최순애 시그림 및 사진전을 마련했다.
<오빠생각>을 비롯해 <봄날> <이불> 등의 최순애 시그림과 이원수선생의 시그림, 두 분이 함께 한 사진 등을 만날 수 있다.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는 이 외에도 지역화가들이 참여하는 최순애 문학그림전, 기념책자 발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기념책자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최순애 선생의 삶과 작품세계와 작품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뜸북뜸북 뜸북새∼’로 시작하는 노래 <오빠생각>.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처럼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노래로 불리는 이 노래는 수원에 사는 열두 살 소녀 최순애 선생이 1925년《어린이》 11월호에 발표한 동시에 1930년 박태준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이다.
최순애 선생은 1914년 2월 14일(음력) 수원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빠는 방정환 선생님과 더불어 어린이문화운동을 했던 최영주, 동생은 <꼬부랑 할머니>를 쓴 최영애이기도 하다. 1925년 <오빠생각>을 발표한 이후로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했던 최순애는 1928년 삼일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배화여고에 입학하지만 얼마 안 돼 건강이 좋지 않아 다니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기쁨사’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이원수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오다 1936년 6월에 결혼을 한다. 가난한 이원수 선생께 시집와서는 어려움도 참 많았다고 한다. 이원수 선생이 남긴 글 <나의 아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스물여섯, 처가 스물셋에 결혼했는데 실직의 가난 속에서 아내는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해방되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나 역시 온갖 경난은 약한 그에게 너무나 과중하게 계속되었었다.’
▲ ©
하지만 최순애 선생은 어둡고 힘든 세상 속에서 문학에 대한 꿈까지도 접고 이원수 선생을 위해 사랑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 여성동아 7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책 『자상한 아내 101장』을 보면 최순애 선생의 남편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벌써 회갑을 보내버리신 분, 젋은 날보다 알뜰하게 강한 내조의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다. 고독한 날의 마음이 더 맑도록, 약해가는 기운을 더 보태도록.’
그런 마음을 이원수 선생은 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언젠가는 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내에게>(『처음 만난 그대로』1979년, 태창문화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그 글 중에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감상적이기만 하던, 그리고 허약하던 내 아내가 긴 세월을 버티어온 그 끈기와 지혜를 고마워한다. 고생을 해도 부부가 된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내도 그렇게 생각해주겠지.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지만.’
문학을 통해 인연을 맺고 한국아동문학을 위해 평생을 보낸 두 사람. 이원수 선생은 1981년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1998년 최순애 선생도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지만 두 분이 남긴 노래는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불리며, 때로는 누군가의 향수를, 때로는 어린 시절 추억을, 때로는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 것이다.
기사입력시간 : 2014년 03월14일 [16:44:15]
<오빠생각>을 비롯해 <봄날> <이불> 등의 최순애 시그림과 이원수선생의 시그림, 두 분이 함께 한 사진 등을 만날 수 있다.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는 이 외에도 지역화가들이 참여하는 최순애 문학그림전, 기념책자 발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기념책자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최순애 선생의 삶과 작품세계와 작품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뜸북뜸북 뜸북새∼’로 시작하는 노래 <오빠생각>.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처럼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노래로 불리는 이 노래는 수원에 사는 열두 살 소녀 최순애 선생이 1925년《어린이》 11월호에 발표한 동시에 1930년 박태준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이다.
최순애 선생은 1914년 2월 14일(음력) 수원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빠는 방정환 선생님과 더불어 어린이문화운동을 했던 최영주, 동생은 <꼬부랑 할머니>를 쓴 최영애이기도 하다. 1925년 <오빠생각>을 발표한 이후로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했던 최순애는 1928년 삼일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배화여고에 입학하지만 얼마 안 돼 건강이 좋지 않아 다니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기쁨사’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이원수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오다 1936년 6월에 결혼을 한다. 가난한 이원수 선생께 시집와서는 어려움도 참 많았다고 한다. 이원수 선생이 남긴 글 <나의 아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스물여섯, 처가 스물셋에 결혼했는데 실직의 가난 속에서 아내는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해방되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나 역시 온갖 경난은 약한 그에게 너무나 과중하게 계속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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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순애 선생은 어둡고 힘든 세상 속에서 문학에 대한 꿈까지도 접고 이원수 선생을 위해 사랑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 여성동아 7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책 『자상한 아내 101장』을 보면 최순애 선생의 남편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벌써 회갑을 보내버리신 분, 젋은 날보다 알뜰하게 강한 내조의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다. 고독한 날의 마음이 더 맑도록, 약해가는 기운을 더 보태도록.’
그런 마음을 이원수 선생은 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언젠가는 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내에게>(『처음 만난 그대로』1979년, 태창문화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그 글 중에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감상적이기만 하던, 그리고 허약하던 내 아내가 긴 세월을 버티어온 그 끈기와 지혜를 고마워한다. 고생을 해도 부부가 된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내도 그렇게 생각해주겠지.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지만.’
문학을 통해 인연을 맺고 한국아동문학을 위해 평생을 보낸 두 사람. 이원수 선생은 1981년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1998년 최순애 선생도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지만 두 분이 남긴 노래는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불리며, 때로는 누군가의 향수를, 때로는 어린 시절 추억을, 때로는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 것이다.
기사입력시간 : 2014년 03월14일 [16: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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