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90년간 애잔한 추억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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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685회 작성일 16-04-06 14:41본문
고향의 봄’ 90년간 애잔한 추억여행
이원수 1926년 잡지 발표 10일 성산아트홀 기념식 이산가족 상봉장서 합창
2016년 04월 03일 (일) 정창훈 기자 changmong@naver.com
▲ 어린이 잡지에 실린 ‘고향의 봄’.
지난해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장에서 이산가족들은 손에 손을 잡고 ‘고향의 봄’ 노래를 불렀다.
60년을 떨어져도 한마음으로 한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 노래, 남과 북을 이어주는 노래 ‘고향의 봄’이 올해 창작 90돌을 맞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 노래는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가 노랫말을 쓴 192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6년 방정환이 내던 잡지 ‘어린이’ 4월호에 동시 ‘고향의 봄’이 실렸다.
보통학교 학생이던 이원수는 9살까지 살았던 옛 동네의 즐거웠던 추억을 동시로 만들어 투고했다.
이 동시가 은메달을 받아 잡지에까지 게재된 것이다.
이듬해 동요 ‘산토끼’를 작사ㆍ작곡했던 이일래 선생은 이 동시로 ‘고향’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다 1929년 홍난파 선생이 다시 곡을 붙여 ‘고향의 봄’이란 제목으로 ‘조선동요백곡집’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원수의 고향은 양산이지만 이원수는 첫돌을 맞기도 전에 양산을 떠나 부모를 따라 창원읍(현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으로 이사 왔다.
이원수가 어릴때 창원읍성(昌原邑城)이었던 소답동은 단독주택, 원룸,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섰다
읍성 안에 살던 이원수는 성 바깥 서당에 매일 다니면서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그는 ‘흘러가는 세월 속에’란 수필집에서 고향 마을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ㆍ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런 그림 같은 경치 속에서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하고 이웃에 사는 동무 아이와 같이 즐겁게 놀며 자랐다.”
이원수가 9살 되던 해 가족들은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마산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이원수는 9살까지 뛰놀던 고향 동네를 그리며 ‘고향의 봄’을 창작한 것이다.
그는 수필에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원수 기념사업을 펼치는 사단법인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는 ‘고향의 봄’ 창작 90주년을 맞아 오는 10일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창원 어린이 고향의 봄 잔치’를 연다.
목각인형 제작기능사인 신동호 씨가 마리오네트(실로 매달아 조작하는 인형극)로 ‘고향의 봄’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어린이들은 음악줄넘기, 난타, 태권체조 공연을 보여준다. 이외에 꽃떡, 꽃등(燈), 사탕꽃, 꽃 컵받침 등 꽃을 소재로 한 다양한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장진화 고향의봄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국민동요인 ‘고향의 봄’이 전국 방방곡곡을 넘어 전 세계에 널리 울려 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원수 1926년 잡지 발표 10일 성산아트홀 기념식 이산가족 상봉장서 합창
2016년 04월 03일 (일) 정창훈 기자 changmong@naver.com
▲ 어린이 잡지에 실린 ‘고향의 봄’.
지난해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장에서 이산가족들은 손에 손을 잡고 ‘고향의 봄’ 노래를 불렀다.
60년을 떨어져도 한마음으로 한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 노래, 남과 북을 이어주는 노래 ‘고향의 봄’이 올해 창작 90돌을 맞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 노래는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가 노랫말을 쓴 192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6년 방정환이 내던 잡지 ‘어린이’ 4월호에 동시 ‘고향의 봄’이 실렸다.
보통학교 학생이던 이원수는 9살까지 살았던 옛 동네의 즐거웠던 추억을 동시로 만들어 투고했다.
이 동시가 은메달을 받아 잡지에까지 게재된 것이다.
이듬해 동요 ‘산토끼’를 작사ㆍ작곡했던 이일래 선생은 이 동시로 ‘고향’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다 1929년 홍난파 선생이 다시 곡을 붙여 ‘고향의 봄’이란 제목으로 ‘조선동요백곡집’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원수의 고향은 양산이지만 이원수는 첫돌을 맞기도 전에 양산을 떠나 부모를 따라 창원읍(현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으로 이사 왔다.
이원수가 어릴때 창원읍성(昌原邑城)이었던 소답동은 단독주택, 원룸,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섰다
읍성 안에 살던 이원수는 성 바깥 서당에 매일 다니면서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그는 ‘흘러가는 세월 속에’란 수필집에서 고향 마을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ㆍ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런 그림 같은 경치 속에서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하고 이웃에 사는 동무 아이와 같이 즐겁게 놀며 자랐다.”
이원수가 9살 되던 해 가족들은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마산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이원수는 9살까지 뛰놀던 고향 동네를 그리며 ‘고향의 봄’을 창작한 것이다.
그는 수필에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원수 기념사업을 펼치는 사단법인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는 ‘고향의 봄’ 창작 90주년을 맞아 오는 10일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창원 어린이 고향의 봄 잔치’를 연다.
목각인형 제작기능사인 신동호 씨가 마리오네트(실로 매달아 조작하는 인형극)로 ‘고향의 봄’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어린이들은 음악줄넘기, 난타, 태권체조 공연을 보여준다. 이외에 꽃떡, 꽃등(燈), 사탕꽃, 꽃 컵받침 등 꽃을 소재로 한 다양한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장진화 고향의봄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국민동요인 ‘고향의 봄’이 전국 방방곡곡을 넘어 전 세계에 널리 울려 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