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곤의 말과 세상] 열어 줘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2018.01.31 광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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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168회 작성일 18-01-31 10:36본문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참가한다고 한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휴전선을 가운데 놓고 분단이 된 지 올해로 74년째이다. 강산이 일곱 번도 더 바뀌었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한번 해 본다. 만약 남한 응원단과 북한 응원단이 같이 노래를 불러야 할 때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을지 말이다. ‘아리랑’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노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로 시작하는 ‘고향의 봄’이다. 젊은이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이 노래 말고는 없을 것 같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1926년 ‘어린이’ 4월호에 이 동요가 ‘입선동요’에 당선되어 등단한다. 그의 나이 열여섯, 마산 공립보통학교 5학년 1학기 무렵이다. 이로부터 다섯 해 뒤 1931년 12월 홍난파가 곡(콜롬비아 레코드사)을 붙여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잘 알고, 노랫말도 기억하지만 정작 이 노래 노랫말을 이원수가 썼다는 것을 잘 모른다. 이원수아동문학전집 제20권 ‘얘들아 내 애기를’(웅진출판, 1984)의 해설 글(‘바르게 사는 길을 깨우쳐 주는 수필’)은 김명수 시인이 썼는데, 그는 여기서 ‘고향의 봄’에 얽힌 사연을 담박하게 들려준다.
“벌써 10여 년 전 이야기다. 나는 당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다. 멀지 않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이었다. 이국 생활에서 해가 바뀌는 것을 처음 맞은 나는 매우 적막하고도 쓸쓸한 기분에 잠겼다. 그러던 차 어느 날, 교민회에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크리스마스가 되고 연말이 되었으니 송년회를 연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다 참석을 하니 빠지지 말고 나오라는 전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가 권하는 바람에 나가 보기로 하였다. 송년회장에 참석하자 나는 나오기를 퍽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분위기가 차차 고조되고 유쾌한 기분이 좌중을 감싸자 재미있는 풍경이 벌어졌으며, 마침내 헤어질 시각이 되자 누군가의 제의에 의해 ‘고향의 봄’을 합창하였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러 젖혔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누구의 눈에서라고도 할 것 없이 모두들 주르르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그 후 나는 가끔 향수에 시달리면 혼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때마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동은 여전했다. 그런 연후 나는 귀국을 하고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서야 부끄럽게도 이 노래의 가사가 이원수 선생의 작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명수도 몰랐던 것이다. 문학을 하는 이들도 ‘고향의 봄’ 노랫말을 이원수가 썼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뭐가 들어 있어 부를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시기 특정한 상황을 잊지 못한다. 특히 그것이 행복했던, 모든 것이 충만했던 때라면 더 간절하게 그립다. 어떤 이는 술만 마셨다 하면 그때 그 일을 몇 번이고 말한다.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스탤지어(향수)’다. 윤도현이 ‘박하사탕’에서 “열어 줘 제발 다시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나 돌아갈래, 어릴 적 꿈에 나 돌아갈래 그곳으로” 하면서 간절하게 돌아가고픈 ‘그곳’, 그곳은 프로이드가 ‘가족 로망스’에서 말했던 “행복한 시절에 대한 갈망”의 ‘심리적 실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잘 알고, 노랫말도 기억하지만 정작 이 노래 노랫말을 이원수가 썼다는 것을 잘 모른다. 이원수아동문학전집 제20권 ‘얘들아 내 애기를’(웅진출판, 1984)의 해설 글(‘바르게 사는 길을 깨우쳐 주는 수필’)은 김명수 시인이 썼는데, 그는 여기서 ‘고향의 봄’에 얽힌 사연을 담박하게 들려준다.
“벌써 10여 년 전 이야기다. 나는 당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다. 멀지 않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이었다. 이국 생활에서 해가 바뀌는 것을 처음 맞은 나는 매우 적막하고도 쓸쓸한 기분에 잠겼다. 그러던 차 어느 날, 교민회에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크리스마스가 되고 연말이 되었으니 송년회를 연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다 참석을 하니 빠지지 말고 나오라는 전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가 권하는 바람에 나가 보기로 하였다. 송년회장에 참석하자 나는 나오기를 퍽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분위기가 차차 고조되고 유쾌한 기분이 좌중을 감싸자 재미있는 풍경이 벌어졌으며, 마침내 헤어질 시각이 되자 누군가의 제의에 의해 ‘고향의 봄’을 합창하였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러 젖혔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누구의 눈에서라고도 할 것 없이 모두들 주르르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그 후 나는 가끔 향수에 시달리면 혼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때마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동은 여전했다. 그런 연후 나는 귀국을 하고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서야 부끄럽게도 이 노래의 가사가 이원수 선생의 작사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명수도 몰랐던 것이다. 문학을 하는 이들도 ‘고향의 봄’ 노랫말을 이원수가 썼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뭐가 들어 있어 부를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시기 특정한 상황을 잊지 못한다. 특히 그것이 행복했던, 모든 것이 충만했던 때라면 더 간절하게 그립다. 어떤 이는 술만 마셨다 하면 그때 그 일을 몇 번이고 말한다.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스탤지어(향수)’다. 윤도현이 ‘박하사탕’에서 “열어 줘 제발 다시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나 돌아갈래, 어릴 적 꿈에 나 돌아갈래 그곳으로” 하면서 간절하게 돌아가고픈 ‘그곳’, 그곳은 프로이드가 ‘가족 로망스’에서 말했던 “행복한 시절에 대한 갈망”의 ‘심리적 실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찬곤
광주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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