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무대인 1920년대 상류층 가옥 - (2012.12.10 경남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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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250회 작성일 15-04-16 11:33본문
고향의 봄` 무대인 1920년대 상류층 가옥
경남의 고택을 거닐다 (2) 창원시 소답동 우성 김종영의 생가
2012년 12월 10일 (월) 전슬기 기자 jsg@kndaily.com
`ㄷ`자형 전체 집 중 곳간채 무너져
치목 정교하고 건물비례 아름다워
대문 앞 310년 수령 느티나무 `눈길`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애국가보다 많이 불렸다는 국민 동요 `고향의 봄`.
이 노래는 이원수 선생이 지은 시에서 홍난파가 곡을 붙여 만들었다.
창원시 소답동에 위치한 전통 가옥. 우리나라 근대 조각가의 이정표이며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우성(又誠) 김종영의 생가. 이 곳이 `고향의 봄`의 노래 무대인 꽃 대궐의 배경지이다.
`어린이 이원수`가 꽃 대궐이라 불렀던 그 곳을 눈꽃이 창원 하늘을 뒤덮은 다음날인 12월 8일 찾았다.
창원 소답초등학교 정류장에서 `고향의 봄 길` 표지판을 따라 큰 마트와 주택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이원수가 술회한 수양버들이 넘실대던 냇가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 변해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푸른 보리가 싱싱함을 뽐내던 남쪽 들판은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콘크리트 숲 속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는 두 채의 한옥 앞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끼다 보면 동심의 한 자락을 잡을 수 있다.
김종영 생가는 그의 증조부 모연 김영수(1857-1931)가 1926년 이전에 증축한 가옥으로, 70년대 산업화로 상가를 비롯한 각종 건물로 둘러싸인 섬이 됐다.
아파트 빌딩 숲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으나 마당 한가운데로 도로가 뚫리면서 `ㄷ자형`의 집 한 채가 허물어졌고 본채와 사랑방 역할을 하던 사미루가 뚝 떨어져버려 마치 별개의 집처럼 됐다.
안채와 사랑채는 1920년대, 대문채는 1940년, 별채와 사미루는 1926년에 각각 지어졌다.
김종영 생가의 대문은 사대부의 대문과는 달리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돼 있고, 전통적인 돌담이 아름답게 형성되고 있으며 하수구 또한 예전의 방식으로 조성돼 있다.
담의 하부는 성곽을 쌓는 방식처럼 큰 돌로 하부를 쌓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로 쌓았는데, 성곽에 사용된 돌보다는 상당히 작고 담은 황토로 채우고 군데군데 돌을 쌓아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
고즈넉히 둘러진 담쟁이 나무와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석교는 요즘에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가정집에 2층 누각이 있는 특이한 구조로 돼 있는 사미루도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김종영의 생가는 안채를 중심으로 왼편에 아래채인 사미루를 뒀고, 오른편에는 곳간채를 뒀다. 그러나 현재 곳간채는 멸실됐고, 소방 도로를 개설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나 안채의 원형은 비교적 잘 간직돼 있다.
안채의 정면에 대문을 둬 안채의 영역을 완성했다. 안채의 평면 양식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건물의 중앙에는 툇마루 반 칸이 있는데, 툇마루의 후면에는 정지, 온돌방, 대청, 온돌방 2칸으로 구성돼 있다. 양 돌출부에는 온돌방이 있다.
기단은 가공한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했고, 가공한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각주를 사용했으며, 건축 양식은 소(小)로로 수장(修粧)한 형식과 장여만 있는 장여 수장으로 나눠진다. 주로 정면부에만 소로 수장을 했다. 상부 가구는 5량가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와는 암수막새를 사용했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이며, 온돌방ㆍ마루ㆍ온돌방으로 구성된 중당협실형이다.
대문채는 평삼문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중앙에 대문을 달았으며, 좌우에 온돌방을 뒀다.
꽃 대궐 앞에는 아름드리 큰 정자나무가 `잃어버린 고향의 봄`에 대한 아픔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먼 길 찾아온 나그네의 쉼터역할을 하며 몇 백 년이 넘도록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310여 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로, 둘레가 무려 580cm나 되며, 마을을 침범하는 모든 잡귀를 막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전해진다.
김종영 생가는 근대 한옥 양식으로 치목(治木)이 정교하고 건물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수납공간과 높은 다락, 미서기 유리문과 출입구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 등은 근대 창원 지방 상류층의 가옥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2005년 9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됐다.
김종영 생가에는 동요에서처럼 복숭아나무는 볼 수 없었지만, 목련인 듯한 몽우리가 맺혀있었기에 목련이나 벚꽃이 필 때는 작은 꽃 대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편집 = 최하나 기자
취재 = 전슬기 기자
경남의 고택을 거닐다 (2) 창원시 소답동 우성 김종영의 생가
2012년 12월 10일 (월) 전슬기 기자 jsg@kndaily.com
`ㄷ`자형 전체 집 중 곳간채 무너져
치목 정교하고 건물비례 아름다워
대문 앞 310년 수령 느티나무 `눈길`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애국가보다 많이 불렸다는 국민 동요 `고향의 봄`.
이 노래는 이원수 선생이 지은 시에서 홍난파가 곡을 붙여 만들었다.
창원시 소답동에 위치한 전통 가옥. 우리나라 근대 조각가의 이정표이며 추상 조각의 선구자인 우성(又誠) 김종영의 생가. 이 곳이 `고향의 봄`의 노래 무대인 꽃 대궐의 배경지이다.
`어린이 이원수`가 꽃 대궐이라 불렀던 그 곳을 눈꽃이 창원 하늘을 뒤덮은 다음날인 12월 8일 찾았다.
창원 소답초등학교 정류장에서 `고향의 봄 길` 표지판을 따라 큰 마트와 주택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서면 이원수가 술회한 수양버들이 넘실대던 냇가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 변해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푸른 보리가 싱싱함을 뽐내던 남쪽 들판은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콘크리트 숲 속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는 두 채의 한옥 앞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끼다 보면 동심의 한 자락을 잡을 수 있다.
김종영 생가는 그의 증조부 모연 김영수(1857-1931)가 1926년 이전에 증축한 가옥으로, 70년대 산업화로 상가를 비롯한 각종 건물로 둘러싸인 섬이 됐다.
아파트 빌딩 숲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으나 마당 한가운데로 도로가 뚫리면서 `ㄷ자형`의 집 한 채가 허물어졌고 본채와 사랑방 역할을 하던 사미루가 뚝 떨어져버려 마치 별개의 집처럼 됐다.
안채와 사랑채는 1920년대, 대문채는 1940년, 별채와 사미루는 1926년에 각각 지어졌다.
김종영 생가의 대문은 사대부의 대문과는 달리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다. 전체적인 형상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돼 있고, 전통적인 돌담이 아름답게 형성되고 있으며 하수구 또한 예전의 방식으로 조성돼 있다.
담의 하부는 성곽을 쌓는 방식처럼 큰 돌로 하부를 쌓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로 쌓았는데, 성곽에 사용된 돌보다는 상당히 작고 담은 황토로 채우고 군데군데 돌을 쌓아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
고즈넉히 둘러진 담쟁이 나무와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석교는 요즘에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가정집에 2층 누각이 있는 특이한 구조로 돼 있는 사미루도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김종영의 생가는 안채를 중심으로 왼편에 아래채인 사미루를 뒀고, 오른편에는 곳간채를 뒀다. 그러나 현재 곳간채는 멸실됐고, 소방 도로를 개설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나 안채의 원형은 비교적 잘 간직돼 있다.
안채의 정면에 대문을 둬 안채의 영역을 완성했다. 안채의 평면 양식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건물의 중앙에는 툇마루 반 칸이 있는데, 툇마루의 후면에는 정지, 온돌방, 대청, 온돌방 2칸으로 구성돼 있다. 양 돌출부에는 온돌방이 있다.
기단은 가공한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했고, 가공한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각주를 사용했으며, 건축 양식은 소(小)로로 수장(修粧)한 형식과 장여만 있는 장여 수장으로 나눠진다. 주로 정면부에만 소로 수장을 했다. 상부 가구는 5량가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와는 암수막새를 사용했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이며, 온돌방ㆍ마루ㆍ온돌방으로 구성된 중당협실형이다.
대문채는 평삼문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중앙에 대문을 달았으며, 좌우에 온돌방을 뒀다.
꽃 대궐 앞에는 아름드리 큰 정자나무가 `잃어버린 고향의 봄`에 대한 아픔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먼 길 찾아온 나그네의 쉼터역할을 하며 몇 백 년이 넘도록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310여 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로, 둘레가 무려 580cm나 되며, 마을을 침범하는 모든 잡귀를 막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전해진다.
김종영 생가는 근대 한옥 양식으로 치목(治木)이 정교하고 건물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수납공간과 높은 다락, 미서기 유리문과 출입구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 등은 근대 창원 지방 상류층의 가옥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2005년 9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됐다.
김종영 생가에는 동요에서처럼 복숭아나무는 볼 수 없었지만, 목련인 듯한 몽우리가 맺혀있었기에 목련이나 벚꽃이 필 때는 작은 꽃 대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편집 = 최하나 기자
취재 = 전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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