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뛰게하는 이름 '조국'… 당신들이 조국을 아나? (노컷뉴스 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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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281회 작성일 15-04-16 11:16본문
가슴을 뛰게하는 이름 '조국'… 당신들이 조국을 아나?
[변상욱의 기자수첩] "반민족 행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2011-11-25 10:52 CBS 변상욱 대기자
<고향의 봄> 작사가인 아동문학가 고 이원수 시인(1911~1981)의 자녀들이 탄생 100년 기념행사 자리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친일 행각에 대해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 차녀의 반성은 이러하다.
"아버지를 존경하던 사람들이 상처 입고 배신감도 느끼신 걸 이해하고 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하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한다."
◇ <고향의 봄>과 <겨울 물오리>
이원수 시인은 191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마산.창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3살 되던 해에 <어린이>지에 [고향의 봄]이 당선되는 등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다. 1935년 일본에 저항하는 반일문예독서회 활동을 하다 적발돼 10여개 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친일성향의 시와 수필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1942년부터이고, 2002년 이원수 씨의 친일작품들이 규명되면서 민족문제 연구소 발행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지원병을 보내며>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이 군가가 울렸다. ......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다.
-<출전> 1942~1943 [반도의 빛]
1942년은 일본군이 싱가폴을 점령하고 남양군도 일대를 휩쓸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이다. 전 국민 동원령과 함께 식민지 탄압을 강화하던 시기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친일 글을 써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원수 시인에 대해 대가성과 이후 삶의 행적을 두고 안타깝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친일 작품을 썼다지만 자식들에게 일본말을 못 쓰게 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한다. 총독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은 것 없이 가난하게 생활했고 계속 감시를 받으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방 이후 독재정권,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자주독립과 민주화, 민족분단의 극복을 위해 끝끝내 자기 길을 걸어간 문인이 그리 흔치 않은 문단 상황에서 매도만 하기엔 너무 안타깝다는 여론도 있다.
다만 스스로 국민 앞에 나서 직접 사죄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유가족들로서는 뼈아플 것이다. 고인은 1970년대 말에 몸져누워 거동을 못했다. 1970년대 말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군 경력이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와 처벌의 여파로 친일잔재 청산이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친일청산이 거론된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절까지 고인이 생존했더라면 당연 사죄의 글을 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동료 작가들은 병석에 누운 채 딸에게 대신 적어 내려가게 한 동시(童詩) <겨울 물오리>가 '참회의 글'일 거라고 받아들인다.
....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이원수 문학에서 고뇌와 참회의 흔적은 곳곳에 진하게 배어 있다.
<염소>
.... 엄매에 엄매에 염소가 웁니다.
울 밖을 내다보고 염소가 웁니다.
이 문 좀 열어줘, 이 문 좀 열어줘.
아무리 발돋움질해 봐도 아니 되어
뿔로 탁탁 받아 봐도 아니 되어 울안에서
염소는 파래진 언덕 보고 매애 웁니다.
잔디밭에 가고 싶어 매애 웁니다...
◇ <친일 비판>과 <침묵 속 참회>, 모두가 사랑이다
해방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휴머니티에 대한 갈구가 이 자리를 대신한다.
1960년 4.19 직후 지은 <아우의 노래>
.... 자유를 달라 외치며 달려들다가
길바닥에 퍽 쓰러져 죽은 4월 19일.
그 무서운 날 언니의 피를 보고 나는 맹세했어요 ...
동화 <어느 마산 소녀의 이야기>는 오빠가 4.19 시위에 참가하자 어린 여동생이 오빠에게 돌멩이를 주워주다 총에 맞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4.19 시위현장을 다큐멘터리로 보는 듯 써내려간다.
<산 동네 아이들>
.... 깎아지른 돌산,
(중략) 반이나 떨어져 나가
허연 뼈살이 바람에 시린 - 돌산
(중략) 오밀조밀 판자집,
동네 아이들 노는 곳에 바로 낭떠러지.
아래에선 오늘도 다이너마이트가 산을 깬다.
동네 아이들은 폭음을 들이마시며
벼랑 위에서 자라는 독수리들이다.
날개가 어려서 아직은 부리로 논다 ...
고인은 1970년대 초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을 다룬 동화를 발표하기도 했고 민족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위한 아동문학의 길도 열었다. 호는 동원(冬原), '겨울들판'이다.
이원수 씨의 친일 작품을 냉엄하게 들추어 꾸짖은 것도, 아픈 민족의 역사를 살피며 작가의 참회를 헤아리는 것도 모두 내 나라를 위한 뜨거운 마음들이다. 속죄로 일생을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고, 아버지의 과거에 솔직히 사죄를 하고, 또 그 사죄를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는 모습은 얼마나 좋은가.
◇ 가슴을 뛰게 하는 이름, 조국
2005년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2006년부터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이 시작됐다. 친일파 170여명으로부터 서울 여의도 땅의 1.3배 정도 되는 1100만 제곱미터, 1천억 원 상당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환수 대상 친일파 후손들의 80%가 이에 불복해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정부 승소율이 85%선). 아예 근거가 되는 특별법이 부당하다며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으나 재산 환수는 합헌으로 결정됐다.
형법상의 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있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 뉘우치고 사죄하지 않는 한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스를 대표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詩) <조국>의 한 구절이다.
"한번을 부르면 가슴이 뛰고,
두 번을 부르면 코끝이 뜨거워지는 이름... 내 조국"
친일잔재 청산에 이르지 못해 친일파 후손이 친일자산으로 호의호식하며 법대로 하자고 떵떵 거리고, 공영방송이 독립군 토벌 친일파와 독재권력자 찬양방송이나 기획하는 나라로 계속 간다면 과연 우리에게도 한 번만 불러도 가슴이 뛰는 조국애가 이어져 갈 수 있을까?
[변상욱의 기자수첩] "반민족 행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2011-11-25 10:52 CBS 변상욱 대기자
<고향의 봄> 작사가인 아동문학가 고 이원수 시인(1911~1981)의 자녀들이 탄생 100년 기념행사 자리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친일 행각에 대해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 차녀의 반성은 이러하다.
"아버지를 존경하던 사람들이 상처 입고 배신감도 느끼신 걸 이해하고 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하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한다."
◇ <고향의 봄>과 <겨울 물오리>
이원수 시인은 191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마산.창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3살 되던 해에 <어린이>지에 [고향의 봄]이 당선되는 등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다. 1935년 일본에 저항하는 반일문예독서회 활동을 하다 적발돼 10여개 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친일성향의 시와 수필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1942년부터이고, 2002년 이원수 씨의 친일작품들이 규명되면서 민족문제 연구소 발행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지원병을 보내며>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이 군가가 울렸다. ......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다.
-<출전> 1942~1943 [반도의 빛]
1942년은 일본군이 싱가폴을 점령하고 남양군도 일대를 휩쓸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이다. 전 국민 동원령과 함께 식민지 탄압을 강화하던 시기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친일 글을 써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원수 시인에 대해 대가성과 이후 삶의 행적을 두고 안타깝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친일 작품을 썼다지만 자식들에게 일본말을 못 쓰게 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한다. 총독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은 것 없이 가난하게 생활했고 계속 감시를 받으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방 이후 독재정권,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자주독립과 민주화, 민족분단의 극복을 위해 끝끝내 자기 길을 걸어간 문인이 그리 흔치 않은 문단 상황에서 매도만 하기엔 너무 안타깝다는 여론도 있다.
다만 스스로 국민 앞에 나서 직접 사죄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유가족들로서는 뼈아플 것이다. 고인은 1970년대 말에 몸져누워 거동을 못했다. 1970년대 말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군 경력이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와 처벌의 여파로 친일잔재 청산이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친일청산이 거론된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절까지 고인이 생존했더라면 당연 사죄의 글을 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동료 작가들은 병석에 누운 채 딸에게 대신 적어 내려가게 한 동시(童詩) <겨울 물오리>가 '참회의 글'일 거라고 받아들인다.
....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이원수 문학에서 고뇌와 참회의 흔적은 곳곳에 진하게 배어 있다.
<염소>
.... 엄매에 엄매에 염소가 웁니다.
울 밖을 내다보고 염소가 웁니다.
이 문 좀 열어줘, 이 문 좀 열어줘.
아무리 발돋움질해 봐도 아니 되어
뿔로 탁탁 받아 봐도 아니 되어 울안에서
염소는 파래진 언덕 보고 매애 웁니다.
잔디밭에 가고 싶어 매애 웁니다...
◇ <친일 비판>과 <침묵 속 참회>, 모두가 사랑이다
해방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휴머니티에 대한 갈구가 이 자리를 대신한다.
1960년 4.19 직후 지은 <아우의 노래>
.... 자유를 달라 외치며 달려들다가
길바닥에 퍽 쓰러져 죽은 4월 19일.
그 무서운 날 언니의 피를 보고 나는 맹세했어요 ...
동화 <어느 마산 소녀의 이야기>는 오빠가 4.19 시위에 참가하자 어린 여동생이 오빠에게 돌멩이를 주워주다 총에 맞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4.19 시위현장을 다큐멘터리로 보는 듯 써내려간다.
<산 동네 아이들>
.... 깎아지른 돌산,
(중략) 반이나 떨어져 나가
허연 뼈살이 바람에 시린 - 돌산
(중략) 오밀조밀 판자집,
동네 아이들 노는 곳에 바로 낭떠러지.
아래에선 오늘도 다이너마이트가 산을 깬다.
동네 아이들은 폭음을 들이마시며
벼랑 위에서 자라는 독수리들이다.
날개가 어려서 아직은 부리로 논다 ...
고인은 1970년대 초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을 다룬 동화를 발표하기도 했고 민족분단과 냉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위한 아동문학의 길도 열었다. 호는 동원(冬原), '겨울들판'이다.
이원수 씨의 친일 작품을 냉엄하게 들추어 꾸짖은 것도, 아픈 민족의 역사를 살피며 작가의 참회를 헤아리는 것도 모두 내 나라를 위한 뜨거운 마음들이다. 속죄로 일생을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고, 아버지의 과거에 솔직히 사죄를 하고, 또 그 사죄를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는 모습은 얼마나 좋은가.
◇ 가슴을 뛰게 하는 이름, 조국
2005년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2006년부터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이 시작됐다. 친일파 170여명으로부터 서울 여의도 땅의 1.3배 정도 되는 1100만 제곱미터, 1천억 원 상당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환수 대상 친일파 후손들의 80%가 이에 불복해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정부 승소율이 85%선). 아예 근거가 되는 특별법이 부당하다며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으나 재산 환수는 합헌으로 결정됐다.
형법상의 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있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 뉘우치고 사죄하지 않는 한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스를 대표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詩) <조국>의 한 구절이다.
"한번을 부르면 가슴이 뛰고,
두 번을 부르면 코끝이 뜨거워지는 이름... 내 조국"
친일잔재 청산에 이르지 못해 친일파 후손이 친일자산으로 호의호식하며 법대로 하자고 떵떵 거리고, 공영방송이 독립군 토벌 친일파와 독재권력자 찬양방송이나 기획하는 나라로 계속 간다면 과연 우리에게도 한 번만 불러도 가슴이 뛰는 조국애가 이어져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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