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책『고향의 봄』그림 김동성(2013년,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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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문학관 자료실의 기사자료입니다. 이원수선생님과 고향의봄기념사업단 관련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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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 고향의 봄 노래 부르며 고향의 봄길 따라 걸으며 /경남신문 2011년 8월 11일자
링크주소 :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995047 [그곳에 가고 싶다] ‘고향의 봄’ 노래 부르며 ‘고향의 길’ 따라 걸으며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중략)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이원수 1980년 수필 ‘흘러가는 세월 속에’ 中 동요 ‘고향의 봄’ 산실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꽃대궐’ 김종영 선생 생가 근대문화유산 지정돼 잘 보존 ‘파란들’ 남산 자락 옛모습 잃었지만 남산공원 가볼만 고향의 봄길로 지정된 소답동 창원초등학교 입구 ~ 김종영 선생 생가 이면도로. ‘고향의 봄’ 노랫말에서 ‘꽃대궐’로 표현된 조각가 김종영 선생 생가. /김승권기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노랫말로 친숙한 국민동요 ‘고향의 봄’.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 선생이 15세 때 쓴 이 동요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음악 교재뿐만 아니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벤(延邊) 조선족자치주 초등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이미 ‘민족의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 이후 들이닥친 ‘산업화 쓰나미’로 인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우리 국민들은 언제부터인가 삶에 지치거나 ‘향수(鄕愁)’에 사무칠 때 자신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탄생했을까.놀랍게도 창원시 천주산 아래 소답동 일원이다. 하지만 상당수 창원시민들은 아직도 ‘고향의 봄’ 동요가 소답동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선생이 유년기를 보내며 깊은 내면으로부터 순수 감성을 발현하고, 문학소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줬던 소답동 일원의 문화적 토양을 잘 정비하고 스토리텔링까지 가미한다면, 국내외 7000만 우리 민족의 ‘마음 속 고향’으로 거듭나면서 ‘고향의 메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진하다. 선생이 지난 1980년에 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수필을 보면, 1920년대 전후의 창원 소답동은 읍성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양산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이사해 아홉 살 때까지 살았던 이곳이 선생의 동심 속에는 ‘작고 초라한 성문 밖 개울, 서당 마을의 꽃,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밭’이 있는 서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또 이원수 선생이 쓴 ‘엄마 기다리는 아이의 노래’라는 글을 보면 어린 나이에 접한 천주산을 그리는 문장이 나오는데, 무척 웅대하게 묘사돼 눈길을 끈다. ‘나는 여섯 살, 누나는 아홉 살,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저녁 때가 되어도 오시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가신 산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천주산이다. 하늘같이 높고 땅덩이만큼 큰 산이었다.’ ‘어머니’라는 작품에서도 소답동 뒤 야산인 북산과 천주산을 이렇게 기억했다. ‘동무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는 곧잘 북산으로 놀러가곤 했었다. 북산은 마을 뒷산으로 그리 크지 않은 산이었다. 그러나 천주산은 높고 컸다. 지금도 천주산을 생각하면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천주산은 나에겐 위대한 산이요, 내 어머니와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선생의 순수 감성은 15세 때에 ‘고향의 봄’ 노랫말을 쓰게 하는 토양이 됐고, 당시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에 투고해 은상으로 당선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그러면 지금의 소답동에는 ‘이원수 선생의 발자취’가 어떤 상태로 남아 있을까. 4~6세 때 살았던 북동리 207번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못 이기고 집터만 남아 기념사업회에서 지난 2004년 ‘이원수 선생 4~6세 성장지’ 표지석을 세웠다. 이원수 선생의 유년기 추억이 새겨진 창원읍성터는 일제강점기 경전선 철로 개설로 파괴되기 시작해 도시 형성 과정에서 대부분 헐려 없어졌으나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흔적이 50m가량 조금씩 남아 있다. 고향의 봄 노랫말 속 ‘꽃대궐’은 한국 조각사의 한 획을 그은 우성 김종영 (1915~1982)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잘 보존돼 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의 근대 한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본과 중국의 영향까지 볼 수 있는 귀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지붕 위 누각이 올려진 별채 사미루는 중국인 석수가 건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입증될 정도로 중국풍의 건축양식도 보인다. 이원수 선생의 ‘정서적 샘’ 역할을 했던 천주산은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향의 봄에서 파란 들로 표현된 남산은 지금은 개발로 자연스런 옛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정상에 조성된 남산공원에는 창원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적과 창원대도호부 비석이 남아 있어 들를 만한 곳이다. 소답동 창원초등학교 입구부터 김종영 선생 생가까지 이면도로는 올해 창원시에 의해 ‘고향의 봄길’로 지정돼, 이원수 선생의 삶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호젓한 주말, 가족과 함께 ‘이념의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아동문학의 거목을 성장시킨 토양 속으로 빠져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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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미발표 詩 수록 '유고시집' 출간 (한국일보 2011.7.4)
이오덕 미발표 詩 수록 '유고시집' 출간 아동문학가이자 교육자로서 우리말 살리기 운동과 어린이 교육에 일생을 바쳤던 이오덕(1925~2003) 선생의 미발표 시가 수록된 유고 시집이 발간됐다. (고인돌 발행)은 1950년대부터 2003년 작고할 때까지 쓴 시 341편을 시대별로 6부로 나눠 실었다. 출판사측은 "아들인 이정우 이오덕학교 교장이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시들"이라고 밝혔다. '참꽃이 필 때면' '학교 가는 길' 등 생전에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에게 준 시 7편도 처음 공개됐다. 경북 청송 출신인 선생은 1944년 초등학교 교사가 된 후 43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교직을 떠난 후에도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에 평생을 바쳤다. 50년대 쓴 시에선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난다. "출석부에 또 하나/ 붉은 줄을 긋는다/ 수업료를 안 가져 온다고 꾸중당한 아이/ 교무실에 불려와 울던 아이/(중략) 달마나 늘어가는 붉은 줄/ 어쩌자고 붉은 줄은 늘어만 가는 것이냐?/ 갈수록 삶은 고달픈 것이냐?"('출석부'중) 경북 안동 대곡분교에서 근무했던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의 시들엔 자연 속 동심의 세계가 활짝 피어오른다. '산에 오르면/ 하늘을 마신다./ 햇빛을 감는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된다.'('산' 중) 학교에서 물러난 80년대 후반의 시들엔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에 힘을 쏟던 모습도 담겨 있다. "우리말 쉬운 말 쉬운 말을 합시다./ 어렸을 때 배운 말 강아지와 주고받던 말/ 그 말이 우리말이지요 정든 배달말/ 우리글로 적는 말 강아지도 알아듣는 말"('우리말 노래'중) 이주영 어린이문화연대 회장은 "고인은 몸이 많이 쇠약해진 뒤에도 마당과 마을과 산을 오르내리면서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귀담아들으며 글을 썼다"고 회고했다.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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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고향의 봄' 最古 악보, 이일래 작곡" (연합뉴스 2011.6.1)
"동요 '고향의 봄' 最古 악보, 이일래 작곡" 이부근의 동요 '고향' (창원=연합뉴스)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가 1일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가장 오래된 악보로 소개한 작곡가 이부근의 '고향 악보.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실린 이 악보는 '산토끼'의 작사 작곡가로 알려진 이일래의 작품이라고 기념사업회는 설명했다. 2011.6.1 bong@yna.co.kr (창원=연합뉴스) 황봉규 기자 =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동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가장 오래된 악보의 작곡자가 밝혀졌다. 경남 창원에 소재한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회장 김일태)는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실린 작곡가 이부근의 '고향' 악보는 동요 '산토끼'의 작사ㆍ작곡가로 알려진 이일래의 작품이라고 1일 밝혔다. 1929년 10월 홍난파(본명 홍영후)가 작곡해 일반에게 잘 알려진 고향의 봄 동요에 비해 5개월 이상 빠른 이 악보는 현존하는 '고향의 봄' 동요 중 가장 오래됐다. 이일래의 동요 '고향' (창원=연합뉴스) ㈔고향의 봄 기념사업회가 1일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작곡가 이일래의 동요 '고향'이 1938년에 발간된 조선동요작곡집에 실렸다. 2011.6.1 bong@yna.co.kr 기념사업회는 당초 이 악보는 제3의 인물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일래의 본명이 최근 이부근으로 확인되면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일래의 호적부와 그의 장녀 명주씨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부친 이름이 이일래가 아닌 이부근이라 표기돼 있다고 기념사업회는 설명했다. 이로써 동요 '고향'은 이원수 작시ㆍ이일래 작곡으로 표기한 '조선동요작곡집'의 발간 연도인 1938년보다 본명인 이부근으로 표기한 악보의 창작연도가 훨씬 앞서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창녕 이방초등학교 이일래 흉상 (창원=연합뉴스) 경남 창녕군 이방초등학교에 설치된 동요 '산토끼'의 작사 작곡가 이일래 선생의 흉상. 이일래 선생은 이부근이라는 본명으로 이원수의 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악보를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에 실었다. 2011.6.1 bong@yna.co.kr 명주씨는 "아버지는 이원수 선생이 쓴 고향의 봄이 좋아서 곡을 붙여 당시 마산의신학교 교사로 있던 박업순에게 선물했고, 이 곡을 받고 감동해 1년의 연애끝에 1927년 12월 결혼했다. 이로써 '고향'은 1926년에 작곡된 셈"이라고 기념사업회측에 밝혀 홍난파 곡보다 3년 정도 빠르다고 주장했다. 기념사업회측은 이원수 작가가 1980년에 발표한 '소년-흘러가는 세월속에'라는 글에는 '동요 고향은 이일래라는 분의 작곡으로 마산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기 시작했다. 뒤에 '산토끼'라는 동요도 그 분이 작사 작곡했고 2, 3년 후에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다'는 내용이 있다고 전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원수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이일래 선생의 오래된 악보가 발견돼 의미가 크다"며 "홍난파ㆍ이일래 선생의 정확한 작곡시기에 대해 추가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앞으로 고향의 봄이 민족의 노래로 더 많이 불려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음악연구가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최근 언론을 통해 4년 전 서울 인사동 경매장에서 입수한 노래동산 창간호를 공개하자 작곡가 이부근과 이일래의 관계, 가장 오래된 고향의 봄 악보 여부 등을 놓고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bong@yna.co.kr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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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고향의 봄' 다른 작곡본 발견" (연합뉴스 2011.5.23)
"동요 '고향의 봄' 다른 작곡본 발견" (서울=연합뉴스) 임은진 기자 = 이원수의 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동요가 하나 더 발견됐다고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23일 밝혔다. 일반에게 잘 알려진 동요는 홍난파(본명 홍영후)가 작곡한 곡이다. 김 이사는 "4년 전 서울 인사동 경매장에서 1929년 5월 통영에서 발간된 동인지 '노래동산' 창간호를 입수했다"며 "그 속에 통영 출신의 작곡가 이부근이 이원수의 '고향의 봄'에 곡을 붙인 '고향'의 악보가 실려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곡이 만들어진 시기와 관련, "책 '새로 쓴 난파 홍영후 연보'에는 홍난파의 '고향의 봄'이 1929년 10월에 작곡됐다고 나온다. 한편 같은 시에 작곡가 이일래가 곡을 붙인 '고향'은 1938년 작곡됐다"면서 "따라서 이부근의 곡이 지금까지 발견된 '고향의 봄' 중 최초의 곡"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원수문학관의 한 관계자는 "이원수의 기록 '1980년 소년-흘러가는 세월 속에'를 보면 이 동요(고향의 봄)는 이일래라는 분의 작곡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2, 3년 후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다'라고 돼 있다"고 전했다. 홍난파보다 이일래의 곡이 먼저라는 얘기로, 이들 곡의 작곡 시기에 대해서는 추가의 고증이 있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기사입력 2011-05-23 21:08 engine@yna.co.kr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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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선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경남신문 2011.5.18)
이원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한 라운드를 넘긴 것 같다. 결국 기념사업회 측에서 사업 일부를 중지 또는 연기하면서 남은 시 예산을 반납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기념사업 추진을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 모두 이 문제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100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했던 기념사업회로서는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데 대한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을 것이고, 일반시민들로서도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조금 보완설명을 하고자 한다. 일부의 주장처럼 이원수 선생은 과연 친일작가인가? 아니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는가? 아시는 바와 같이 이원수 선생은 우리 고장이 낳은 유수의 아동문학가다. ‘고향의 봄’ 동시를 15살 때 썼으니 문학적 재질은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11년에 태어나 1981년 작고할 때까지 동시, 동화, 동극, 수필, 평론 등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암울한 일제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반은 식민지통치시대에 살았고 나머지 반은 광복된 조국에서 살았다. 그의 삶이 바로 우리 민족의 질곡의 근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일제시대 말기 한두 해 동안에 그가 근무하던 함안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한 친일작품 5편에 대해서다. 1000편 중 5편이면 극소수이긴 하나 친일작품이라면 단 1편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왜 그런 작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누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친일행위라 하고, 또 누구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생계형 친일이라 한다. 생계형 친일이란 말이 옹색한 변명이긴 하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적극적 친일과는 분명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아무튼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처럼 징용을 선동하는 강연을 다니거나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신문에 싣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이태준이나 정지용처럼 절필을 하지도 않았고, 이육사나 김사량처럼 목숨을 걸고 저항시를 쓴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적당히 일제의 억압에 굴종하며 삶을 영위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가 친일작가의 오명을 쓰게 된 이유다. 그에 대해 또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른바 독서회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른 경력도 있다는 것이다. 독서회란 몇몇 지인들끼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순수한 독서클럽이었는데, 일제가 불순한 모임으로 몬 사건을 말한다. 이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다소 애매하긴 하나, 어떻든 그가 젊은 날에 이런 활동도 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렇든 저렇든 분명 그는 오점을 남긴 작가다. 생계형 친일이란 말도 사실 구차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가 메마른 이 땅 어린이들의 마음 밭을 일구어 가꾼 동심과, ‘고향의 봄’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심어 놓은 애틋한 그리움 또한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시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하는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할 것인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그를 영원히 친일작가로 낙인찍어 버릴지 판단은 순전히 시민의 몫이다. 어쨌든 간에 그의 행적을 낱낱이 밝혀서 공적은 공적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있는 그대로를 후대에 넘기는 일을 이번에 해야 한다. 사실 공과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큰 나무의 가지 몇 개가 썩었다고 해서 통째로 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깊이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이한영(경남아동문학회 부회장·아동극작가)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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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 이원수를 위한 변명 (한국일보 2011.4.12)
이원수 선생은 1942~43년 사이 금융조합 본사 사보인 반도의빛에 동시 등 5편을 발표했다. 반일 독서회 사건으로 선생은 옥고 뒤에 전 직장인 함안금융조합 가야지소에 어렵게 복직했다. 마산교도소를 나와 '오빠생각'을 쓴 최순애씨와 결혼을 하고 아들 둘과 딸 하나, 자식 셋을 낳았다. 그런 이원수 선생에게 금융사보에서 글을 발표할 것을 요구할 때 분명 어떤 협박도 뒤따랐을 것이다. 그 시기, 일본이 광분하던 최악의 시절이었다. 부인과 어린 자식 셋을 둔 아버지인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삶이 넉넉했다면 선생도 절필을 하고 함안을 미련 없이 떠났을 것이다. 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상고의 전신) 학력이 전부인 것을 말하듯 선생은 다른 친일작가와는 다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약해 누나가 마산의 권번에서 일하며 소년 이원수의 학비를 댔다. 선생은 직장을 잃었을 경우 찾아올 공포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붓을 들었을 것이다. 이원수는 친일작가가 아니라 친일시를 쓴 동시인이다. 일본의 권세를 입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살기 위해서. 나는 선생을 친일로 모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런 경우 당신은 어떻게 했겠는가? 일제 36년이 한 짓 중에 가장 나쁜 것은 친일문인을 만든 것이다. 친일 운운 하는 이 시대가 아직 일본의 식민지인 것 같아 안타깝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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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여담> 고향의 봄 (문화일보 2011.4.13)
‘고향의 봄’ 문화일보 | 기자 | 입력 2011.04.13 14:01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1981년에 70세의 나이로 타계한 아동문학가 동원(冬原) 이원수가 15세 때에 지은 동시 '고향의 봄'이다. 소파(小波)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 1926년 4월호에 게재됐다. 경남 창원에서 유년기를 보낸 동원이 부모의 이사로 지금의 성호초등학교인 마산공립보통학교 6학년에 다닐 때다. 1928년에 발표된 동요 '산토끼'의 작사·작곡자로 당시 경남 창녕 이방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이일래가 곡을 붙여 일부 지역에서 불리기 시작했다. 국민동요화한 것은 홍난파가 1935년에 새로 곡을 붙인 이후다. 반일(反日) 모임인 함안독서회사건으로 체포돼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동원은 '고향의 봄' 외에도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꼬마 옥이' '해와 같이 달과 같이' 등 주옥같은 동시와 동화를 많이 남겼을 뿐 아니라 장편동화와 소년소설 분야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1982년에 정부가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한 것도 그래서다. 그런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이 찬반 논쟁에 휩싸여 추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창원 지역의 22개 시민단체가 '친일 작가 이원수 기념사업저지위원회'를 구성해 창원시의 계획에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원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경남아동문학인협회 등은 "이 선생의 친일 작품 5편이 발견돼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작품은 결코 훼손해서는 안될 소중한 문화 자산"이라면서 기념사업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원시는 15일까지 시민 설문조사를 실시해 기념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일시적 친일 행적을 앞세워 그의 생애와 업적을 매도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고향의 봄'을 불러선 안된다고 우기는 행태와 다름없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일제 말기 이원수 선생의 친일 시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한때의 친일이 안타깝고 섭섭한 일이라면서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선생만큼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 만난 적이 없다. 작품으로도 그렇다." 김종호 논설위원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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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차만별인 그들의 공통 주제는 '고향' (한국일보 2011.4.1)
탄생 100주년 맞은 한국 문인 8명 곳곳서 기념 문학제 7,8일엔 심포지엄·문학의 밤 등 다양한 행사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1911년생 한국 문인들을 기념하는 문학제가 열린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서울시 후원으로 '이산과 귀향, 한국문학의 새 영토'라는 주제로 7일부터 다양한 기념 행사를 마련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은 장편 를 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가인 김남천, '사슴'으로 유명한 시인 노천명, 으로 농민소설을 대표하는 박영준, 대하소설 의 안수길, 의 정비석, '나비'의 시인 윤곤강, 동요 '기찻길 옆'의 윤석중과 '고향의 봄'의 이원수.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문학적 경향은 천차만별인데, 주최측은 이들을 '고향'이라는 테마로 묶었다. 기획위원장을 맡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의 중심부를 관통한 1911년생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고향이라는 문학적 주제가 발견된다"며 "고향은 '잃어버린 낙원'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는 삶의 터전'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들이 발견한 고향이란 주제는 이후 한국 사실주의 소설 발전의 한 기틀이 됐다는 평가다. 주최측은 7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교보컨벤션홀에서 심포지엄을 열어 이들 작가와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살핀다. 김진희 이화여대 교수, 김제곤 인하대 교수, 강상희 경기대 교수, 채호석 한국외대 교수, 신형기 연세대 교수 등이 참여해 각 작가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진행한다. 8일 오후 7시에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문학창작촌 야외무대에서 이들 작가의 주요 작품을 낭송하고 무용과 음악공연도 어우러지는 '문학의 밤'이 마련된다. 주최측은 또 한국근대문학회와 공동으로 6월 18일 고려대에서 '탄생 100주년 근대문인들의 문학세계'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해 개별 작가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조명한다. 이와 함께 윤석중ㆍ이원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학그림전이 8~10월 열리는데, 황주리 이인 등 국내 화가 10명이 윤석중 이원수의 동시 등을 형상화해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등에 전시할 예정이다. 8월 27일에는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윤석중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학술대회도 열린다. 이들 문인 중 친일 논란이 불거진 인물도 있는데, 한국작가회의의 이은봉 사무총장은 "친일, 친독재까지 우리 문학의 논의의 장으로 끌고 들어와 문학적 공과 과를 살펴보자는 뜻에서 모두 함께 다루기로 했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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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생각과 고향의 봄 (경기일보 2008.5.19)
‘오빠 생각’ ‘고향의 봄’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때) /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 귓들 귓들(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최순애(崔順愛·1914~1998) 선생이 작사하고 박태준(朴泰俊·1900~1986) 선생이 작곡한 그 유명한 동요 ‘오빠 생각’입니다. 이 동요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습니다. 이 동요는 1925년 11월 경기도 수원(水原)에 살고 있는 12세의 소녀 최순애가 방정환 선생이 내던 어린이 잡지 ‘어린이’에 투고, 동시란에 입선으로 발표된 작품입니다. 어린이 운동에 헌신하던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1900~1932) 선생은. 1925년 3월 ‘어린이’를 창간하여 우리말로 쓴 창작 동요, 동시, 동화들을 많이 발표토록 했습니다. ‘고향의 봄’ ‘반달’ ‘산토끼’ ‘퐁당퐁당’ ‘오빠 생각’ ‘따오기’ ‘고드름’ 등이 그 ‘어린이’에서 탄생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1926년 4월 ‘어린이’에 발표된 경남 마산(馬山)의 16세 소년 이원수(李元壽·1911~1981)의 동시 ‘고향의 봄’ 입니다. 이 동시는 ‘어린이’가 실시한 현상공모에 당선작품으로 뽑혔습니다. 같은 잡지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한 인연으로 최순애와 이원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문학과 우정을 나누다가 사랑을 하게 됐습니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이원수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마산상업고등학교를 마치고 함안금융조합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최순애와 이원수는 편지를 주고 받은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날 약속을 하였습니다. 배화여고를 나와 작품활동을 하던 최순애를 찾아 이원수가 수원에 왔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원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독서회’라는 단체를 통해 불온한 사상을 퍼트렸다는 게 죄목이었습니다. 그래서 1년여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눈앞에서 연인이 체포돼가는 모습을 지켜본 최순애는 틈만 나면 이원수를 면회하였고 마침내 1936년 6월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원수 선생은 광복 후 서울에 와 교사생활을 하며 한국아동문학의 거목이 됐고, 최순애 선생은 남편 뒷바라지에 더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림자’ ‘우산모자’ 등 명작이 들어있는 동시집을 발간하려고 준비했으나 6·25 전쟁으로 원고가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빠 생각’만으로도 불변의 위치에 섰습니다. 오빠 생각’과 홍난파(洪蘭坡·1898~1941) 선생이 작곡한 ‘고향의 봄’은 이렇게 순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일제 시절의 소년·소녀가 쓴 동시가 오늘날에도 애창되는 연유는 노랫말이 애틋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오빠 생각’ 속의 ‘오빠’는 ‘기다림’ 입니다.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돌아오겠다는 오빠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뜸북새가 논에서 울고, 뻐꾹새가 숲에서 울고 가을이 되어 기러기가 북쪽에서 날아오고 귀뚜라미가 밤새 우는데도 소식도 없는 오빠를 기다리는 ‘누이’의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하지만 누이의 기다림은 이루어졌습니다. 사랑을 만나고 광복이 되었습니다. ‘고향의 봄’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정겹습니까. ‘고향의 봄’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오빠 생각’이 기다림이라면 ‘고향의 봄’은 그리움입니다. 고향을 잃으면 삶이 허전해집니다. 고향을 잃으면 행복이 아스라한 꿈으로 멀어집니다. 고향은 결속과 믿음과 나눔으로 충만한 보금자리입니다. 보리밥과 열무김치, 무짠지가 꿀맛이었고.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찔레순을 꺾어먹던 가난 마저도 풍요롭게 윤색되는 곳이 고향입니다. 들판이 파랗게 펼쳐진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는 고향이 삼삼하게 떠오릅니다. 바야흐로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처럼 산천초목에 ‘기다림과 그리움이 가득합니다.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어린이와 어른들이 한 자리에서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을 노래하면 어떨까요. 새들도 아마 따라서 합창하겠습니다. 마침 기다리던 봄비가 오셨습니다. 2008년 05월 19일 (월)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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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부르면 정겨운 고향 풍경 떠올라 (어린이강원일보 2009.4.9)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고향의 봄’ 겨울이 지나면 산수유 꽃망울이 봄을 예고하고 개나리 진달래가 피면서 봄이 완연함을 실감나게 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야산을 뛰어 다니며 참꽃이라 불리는 진달래꽃을 혀가 빨개지도록 따먹으며 놀던 생각이 난다. 옛 동산은 지금 사라지고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그리운 친구들의 모습을 회상하기도 한다. 봄꽃이 흐드러질 무렵 어느 시골을 가나 살구꽃과 복숭아꽃 활짝 피어 있었다. 고향을 떠난 많은 사람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산다. 특히 어렸을 때 즐겁게 놀던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고향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다. 고향이라는 낱말에는 다정함과 그리움, 정감이 넘쳐 흐른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동요가 ‘고향의 봄’이 아닐까 싶다. 1955년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가 만들어지면서 초창기에는 이 노래로 4학년에서 피아노 건반 공부를 함께 했다. 1972년부터 6학년 교과서에 본격적으로 ‘고향의 봄’이 실리면서 2부 합창곡 공부를 하게 되었다. 둘째와 넷째 줄 가락이 똑같은 형식 공부와 아울러 2부 합창곡이므로 화음에 대한 공부도 함께 했다. 하지만 1997년 6학년 교과서부터 점차적으로 본 단원에서 배우지 않고 교과서 뒷부분의 즐거운 노래에 실리게 되었고, 결국 2002년부터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가 초등학교 전 학년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현재 대학교 1학년 이후 세대는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를 학교에서 아예 배우지 않게 된 것이다. ‘아리랑’ 노래보다는 못하지만 ‘애국가’보다 많이 부르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한주민은 물론 해외동포들도 즐겨 부르는 ‘고향의 봄’을 앞으로는 듣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안타깝다. ‘고향의 봄’의 노랫말은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님이 중학생 시절 지은 시다. 방정환 선생님이 펴낸 아동 잡지‘어린이’에 이 시가 당선되면서 1926년 처음 발표되었다. 마산의 이일래 선생님이 이 노랫말에 곡을 먼저 만들었으나 잘 불리지 않았다. 이후 홍난파 선생님이 작곡한 노래가 발표되면서 세상에 알려져 널리 애창되었다. ‘고향의 봄’이 작곡되었을 때는 내림나장조로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교육용으로 도입하여 배우면서 다장조로 조옮김하여 공부하게 되다 보니 높은 ‘미’ 음정 내기가 어려웠다. 변성기의 6학년 어린이들이 노래 부르기 힘겨워 내림나장조로 조옮김하여 노래 부르게 하는 지혜로운 선생님도 있었다. 물론 능숙한 반주 실력이 따라 주어야 가능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진달래가 피지 않는 산은 없다. 또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복숭아꽃 살구꽃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꽃들이 한창일 때 수양버들을 포함한 많은 식물도 연둣빛 고운 새싹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면 사람들은 어느덧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고향의 봄’에는 어릴 적 뛰놀던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녹아 있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어있는 자연 속에서 즐겁게 놀던 행복한 때를 추억으로 떠올리면서 사람들은 ‘고향의 봄’을 더 많이 부르게 되는 것 같다. 너무 오래된 노래이고 요즘 어린이들의 주변 풍경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향의 봄’이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어린이들 입맛에 맞는 동요도 좋지만 어린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 노래도 많이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향의 봄’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고향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과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게 해주는 훌륭한 노래이다. 2010년부터 검인정 제도로 바뀌게 되는 음악 교과서를 위해 지금 서울과 울산 등지에 계신 음악인들이 새로운 교과서 집필에 한창이다. 제작이 완성되어 학교별로 음악 교과서를 선정할 때 ‘고향의 봄’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 채택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고향의 봄’이 다시 전 국민에게 다가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로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동근선생님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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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와 3.15 (경남도민일보 2011.3.16)
이원수와 3·15 해마다 3월의 끝자락엔 3·15 기념관에서 백일장을 개최한다. 화창한 봄날 아이들과 3·15국립 묘역에서의 하루는 항상 상쾌하고 봄날의 좋은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원수 선생 작품 중에도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어느 마산 소녀의 이야기'는 1960년 3·15부정선거가 있던 해 세계일보에 발표된 생생한 역사적 증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영희가 하굣길에 자신의 오빠가 참석중인 시위에 돌멩이를 주워 주다가 팔에 총상을 입는 짧은 이야기다. 병든 선생님을 걱정하는 순수한 여학생과 친구 간의 우정을 중요시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읽혀지는 단편동화다. 아이의 시선에서 당시 급박하게 돌아갔던 시위 현장을 다큐멘터리를 보듯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 발표된 동시에서도 '자유를 달라 외치며 달려들다가 / 길바닥에 퍽 쓰러져 죽은 4월 19일 / 그 무서운 날 언니의 피를 보고 / 나는 맹세했어요.'라고 4·19를 이야기했다. 아동문학에서 이렇게 당시 상황을 작품으로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원수는 다른 문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고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생은 많은 동화와 동시를 통해 질곡의 한국현대사를 그리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곧은 소리를 내려고 했고,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의 삶은 그가 남긴 많은 작품에서도 알 수 있다. 최근 이원수 선생이 일제말기 썼던 친일 작품으로 떠들썩하다. 떠들썩한 목소리가 높다는 것은 그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위치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손들에게 더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도 우리 가족은 3·15백일장에 참석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이원수 선생의 동화를 읽고, 우리지역의 역사를 한 번 더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목숨 걸고 바꾸어 놓은 열사들을 3·15기념관에서 같이 둘러볼 예정이다. /황인화(창원시 팔룡동) [독자투고] 3·15의거와 이원수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2572 - 경남도민일보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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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윤석중-이원수 선생 탄생 100돌 맞아 추모열기 (동아일보 2011.3.10)
“시대를 넘어 동심 지켜준 두 거목” 올해는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과 이원수(1911∼1981)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윤석중의 ‘졸업식의 노래’ ‘퐁당 퐁당’ ‘낮에 나온 반달’이나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같은 동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요로 불러봤을 정도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아동문학계는 올 한 해 다양한 전시회와 추모제 학술제 등을 통해 두 거장이 바라본 동심을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문학관은 또렷하게 대비되는 개성을 지닌다. 윤석중이 밝고 맑은 순수한 동심을 추구한 반면 이원수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가난한 삶을 사는 어린이들의 현실에 천착했다. 개인적인 생애에도 차이가 있다. 윤석중은 다른 예술가와 활발히 교류했고 광복 이후에는 교과서에 자신의 동시가 다수 수록되는 영광을 누린 데 비해 이원수는 조용히 작품 활동에만 몰두했다. 두 사람 모두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년 문사로 활약했을 정도로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윤석중이 ‘봄’을 발표한 때가 열세 살이었고, 이원수가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시작하는 ‘고향의 봄’을 지은 때는 열다섯 살이었다. 1920년대 방정환의 ‘어린이’ 잡지 독자투고란을 통해 당시 어린이 문사들은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이를 통해 만들어진 ‘굴렁쇠’라는 회람잡지 모임에서 두 사람은 교우했다. 윤석중은 홍난파 등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만든 동요만 800여 곡에 달한다. 이원수는 동시뿐 아니라 동화, 소년소설, 수필, 평론, 아동극 대본 등 약 1000편의 작품을 남겼다. 새싹회(이사장 노원호)는 계간지 ‘새싹문학’ 여름호에 윤석중의 생애와 문학관, 사진 등을 담은 윤석중 특집을 마련하고 11월에는 ‘윤석중 탄생 100주년 기념 아동문학인 작품 전시회’를 연다. 매년 12월에 열리는 윤석중 문학상 시상식에 맞춰 올해는 윤석중의 동시에 곡을 붙인 동요 공연을 함께 열 예정이다. 새싹회는 윤석중이 한국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해 1956년에 만든 단체다. 이원수의 고향인 경남 창원에서는 사단법인 고향의봄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올해 1월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 김일태)가 설립됐다. 사업회는 그의 타계일인 1월 24일 이원수문학관에서 이원수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4월에는 ‘이원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와 ‘고향의 봄 전국 어린이 잔치’를 연다. 10월에는 국제아동문학축전, 이원수 문학상 시상 등의 기념사업이 열린다. 창원의 예술·문화단체들도 ‘고향의 봄 칸타타’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시민단체 일부가 이원수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기념사업 행사에 세금을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문화지원단체 중 하나인 대산문화재단을 비롯해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한국아동청소년문학회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두 아동문학가의 동시에 모두 곡을 붙여 동요를 만든 작곡가 백창우 씨는 “윤석중 선생은 우리말의 재미와 아름다움을 잘 살렸고, 이원수 선생은 아이들 삶의 어두운 자리까지 섬세하게 살폈다”며 “오늘날 침체된 우리 동시 동요가 나아갈 길을 두 거장의 문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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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시론> 고향의 봄 (대구신문 2011.3.9)
고향의 봄 박동규 대구중리초등학교 교장 올해는 동원(冬原) 이원수 탄생 100주년이 된다. 동원 이원수는 1911년에 경상남도 양산읍에서 태어나 1981년까지 살면서 작고할 때까지 동시만은 계속 지었다. 동원 이원수는 1926년 동요 ?고향의 봄?을 어린 나이인 15세 때 지어, 방정환의 '어린이'지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이원수의 초기 작품 내용은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감정을 대신했기 때문에 동시의 공간은 사람의 구체적 행동세계를 소극적 저항의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중기 작품은 동요가 품을 수 있는 시적 감정의 제약성을 대체시키면서 되도록 한국적인 서정을 동시에 심어 나간다. 그러면서 이원수는 우리들이 겪은 일, 우리들의 생활에서 얻은 이야기를 그대로 동시로 나타내어 실제적·사실적 현실공간을 있는 그대로 존재의 공간조건으로 만들어 나간다. 1950년 한국동란 후의 작품 소재나 제재는 주로 자연에 존재하는 나무, 꽃, 달, 바람 등 원형상징의 유추적 이미지를 가지는 것들이다. 후기에 이원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는 시의 형상성 언어의 상상적 공간을 강조하면서 동시를 어린이다운 마음바탕이라는 개방적 해석을 하게 된다. 그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미래지향 의식을 심어 주려고 노력한다. '고향의 봄'에서 `고향’의 이미지는 둘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다른 하나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이다. 우리의 의식적 마음이 진통을 겪을 때 유년의 세계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 이전과 같이 무의식의 상태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 할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며 삶의 터전으로 상처입지 않은 땅을 뜻한다. 이원수 동시에 나타난 고향의 종류는 다양하다. `나의 살던 고향, 나의 옛 고향, 내 고향 바다, 떠난 고향’ 등인데 모두가 향수를 담고 있다. 앞선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존재의 시작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갖게 한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갖는 고향은 그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향수병이다. 그러나 미지의 먼 곳이나 옛날에 대한 그리움만 남는 이향 감정도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에서 나는 성장한 후의 여러 모습이고 향수를 담고 있다. 이 동시의 전체적인 서술은 당시의 형식인 정형에서 벗어나 산문적이다. 화자의 현재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 조용하고 한적한 리듬 상태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놀던 때…’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 향수병으로 생동하고 활발하게 움직인다. 현재의 과거회상은 미래 기대이고 과거의 유년, 추억, 고향은 걸어 온 거리로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 시의 공간적인 요소인 산골·복숭아꽃·살구꽃·아기 진달래 등의 이미지 형성배경은 모두 고향이다. 또 집안, 산, 파란들, 냇가, 산골 등의 원근법 구사는 시각적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고향의 이미지가 유아적 사고로 유동적인 향수병을 만든다. 이 시의 중심은 나의 살던 고향, 옛 고향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게 한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는 소극적 저항이고 퇴행공간을 설정하게 된다. 이 동시의 교육적 의미는 문학적 예술성인 향수병과 교육의 가치인 소극적 저항의식을 가지는 양면성이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형성배경은 고향이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봤을 때 도피 공간 이미지를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쓰며, 아름다운 말이 한갓 겉치레를 위한 말이 아니고 적절히 드러나게 씌었느냐를 보여 주는 것은 국어 교육적인 면에서의 동시의 가치로 해석된다. 그리고 시의 말에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것을 즐기는 사람은 국어의 순화라든지 일상 회화의 정결한 사용에 차츰 익어 갈 뿐만 아니라 작가의 인생관에서 다듬어진 진솔한 마음의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원수의 '고향의 봄'은 어린이가 읽어도, 어른이 읽어도 교육성이나 교육적 가치이전에 인지상정의 고향 그리움이 우선하기 때문에 많이 읽혀지는 것이리라.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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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 이원수는 다른 친일인사와 다르다 (노컷뉴스 2011.3.4)
기념사업회, 이원수는 다른 친일인사와 다르다 "어떤 평가 받고 있는 인물인가 하는 본질로 접근해야"…기념사업 추진 논란 [경남CBS 송봉준 기자] 경남 창원시가 친일시를 쓴 아동문학가 이원수 작가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원수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가 "이원수는 여느 친일인사들과는 달리 평가돼야 한다"며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놨다. 이원수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와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는 4일 '이원수탄생100주년기념사업 논란에 대한 기념사업회의 입장'이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올해는 '고향의 봄'을 지은 이원수 선생이 돌아가신지 30년,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기도 하다"며 "이런 뜻 깊은 해를 맞아 추진하고 있는 기념사업이 새삼스레 친일 논란과 우상화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단 한 차례의 잘못도 용서될 수 없다는 극단적 역사논리보다는 한때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만 그 뒤 치열하고 진지하게 뉘우치고 새롭고 올바른 삶을 통해 평생 사회와 국가에 더 큰 이바지를 했다면 그 삶도 가치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는게 현실적이고 올바른 교육이 아닌가 한다"면서 "우리는 이원수 선생이 과대 포장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기념사업회는 또 "한 인물에 대해 기념사업을 반대하는 근거가 친일작품을 썼고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인가 하는 본질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며 "이원수는 여는 친일인사들과는 달리 평가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념사업회는 지역사회의 합의 논란에 대해 "이원수 선생의 친일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으며 단지 다양한 기념사업과 토론회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위해 노력해 왔다"면서 "이외에 어떤 방법으로 무슨 절차로 사회적 합의가 이뤄내야 하는지에 대해 역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뿐이다"고 지적했다. 기념사업회는 이어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 여러 단체에서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생의 고향이자 문학관이 있는 창원에서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펼친다면 전국적으로 문화도시 창원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에서 추진해 왔다"며 "한 인물을 우상화하는 여타의 기념사업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bjsong@cbs.co.kr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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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기념사업 논란을 보면서 (경남도민일보 2011.3.4)
이원수 기념사업 논란을 보면서 마산을 떠난 지 벌써 8년이 되었다. 이제 마산은 명절 때나 잠시 찾는 그리운 고향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인터넷으로 경남도민일보를 보면서 고향소식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 참 가슴이 아려 오는 소식을 보았다. 마산을 떠날 때까지 '이원수 기념사업회'일을 했고, 고향의 봄 도서관 안의 전시패널 문구 교정도 했기에 누구보다 이번 일을 보면서 애증이 교차한다. 더구나 이번 일의 한 축인 '열린사회 희망연대'는 마산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회비를 내는 회원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원수는 친일을 한 것이 맞다. 하지만, 다른 친일 부역자와 달리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대상이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친일행위를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 작품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일부 문학연구자들 사이에는 이미 그의 친일작품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섣불리 작품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전쟁 이후 그의 문학 활동성과 때문이다. 그가 다른 친일파들처럼 정권에 빌붙어 편안하게 여생을 보냈다면 내 가슴이 답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이원수 문학'은 단순한 문학가의 업적으로만 치부하기엔 사회적으로 너무 많은 성과를 낳았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한국전쟁을 남북 대립의 관계가 아닌 분단의 아픔 문제로 다가간 최초의 작품이 '메아리 소년'이며, '호수 속의 오두막집'은 한국전쟁과 수몰민의 아픔을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글로 썼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노동의 가치를 동화로 알린 것이 '불새의 춤'이다. 이번 논란의 한 축인 열린사회 희망연대는 이원수 문학의 실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문학성과 작품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가! 혹시 해방 이후 작품도 '친일문학인'이란 이름 아래 읽지 않기를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는 않는가! 또한, 창원시는 왜 그렇게 문학상 제정, 기념공원 조성 같은 보여주기 행사에 집중하려 하는가! 시장을 비롯한 일을 추진하는 간부공무원들은 이런 이원수 작품을 한 편이라도 제대로 읽고 하는가! 생각을 해 본다. 지금 도서관에서 일하는 나는 이용하는 어린 이용자에게 여전히 이원수 작품을 열심히 권하고 있고, 내 아이에게도 읽힐 것이다. 통일문제와 노동문제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바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데 이원수 작품보다 나은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최진욱(울산 북구 기적의 도서관 근무·열린사회희망연대 회원)
2015-04-16 | 작성자 : 이원수문학관 | 조회수 : 2060
이원수문학관 / 주소 : (51371)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평산로 135번길 32 고향의봄도서관 지하 1층 (서상동 산60번지) / 대표전화 : 055-294-7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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