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와 한국음악 <28> <고향의 봄>과 동요(童謠)의 시대 (2013.01.03 ART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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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449회 작성일 15-04-16 11:34본문
<고향의 봄>과 동요(童謠)의 시대
창가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며 신식 노래의 대명사로 불리어지던 1920년대, 이 땅에는 ‘동요(童謠)’라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막을 연 최초의 작품이 1924년 발표된 윤극영(尹克榮)의 <반달>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박태준(朴泰俊)①이라는 걸출한 동요작곡가가 있었지만, <반달>을 동요의 효시로 보는 것은 윤극영이 1926년 최초의 동요작곡집 『반달』을 발표하면서 동요의 진정한 태동기를 열었기 때문이다.
동요란 어린이의 정서를 표현한 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라고 정의할 수가 있겠는데, 창가와 일본노래가 범람하던 당시로서는 단지 어린이를 위한 노래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동요는 일본 창가를 대신할 민족 음악교육의 필요성에서 탄생했고, 조선인의 음악적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민족의 노래가 절실했던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일종의 ‘음악 문화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초의 동요인 <반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거라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과 설움을 그린 이 노래는 짧은 시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국민적 애창곡으로 불려졌다. 조선의 ‘반달’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하늘을 떠다니지만,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는 ‘샛별’이 있다. 그 등대를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라는 희망의 메시지는 <반달>이 동요의 영역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노래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반달>은 2박자 계열의 일반 동요와는 달리 3박자 계열의 8분의 6박자를 사용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여기에 때마침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했다는 점도 태동기 동요의 전파에 날개를 달아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윤극영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홍난파보다 3년 늦게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작곡과 성악을 전공했다. 법학을 포기하고 유학길에 오른 그는 도쿄에서 홍난파와 방정환(方定煥)을 만나 음악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특히 방정환 등과 1923년 ‘색동회’②를 조직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음악과 문화운동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 매체가 그해 방정환에 의해 창간된 아동잡지 『어린이』였다.
『어린이』는 이후 한국 아동문학과 창작동요의 메카로서 더 없이 소중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윤극영의 <반달>이 발표된 것도 이 잡지를 통해서였고, 홍난파의 <고향의 봄>이 세상에 나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바로 잡지 『어린이』를 통해서였다.
1926년 4월호 『어린이』에는 동요 입선작이 발표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당시 마산의 성호보통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원수(李元壽)의 작품 <고향의 봄>이었다. 당시 15세였던 이원수는 소년회 활동을 통해 어린이운동의 선구자 방정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이 잡지에 원고를 보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당선작으로 소개가 되었던 것이다.
경남 양산(梁山)에서 태어난 이원수는 곧 창원(昌原)으로 이사를 해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창원은 인근 마산(馬山)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가 아름답게 펼쳐진 ‘꽃대궐 동네’였다.③
15살 소년은 어린 시절 ‘꽃피는 산골’에 대한 추억과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에서 놀던 때를 그리워하며 이 시를 썼던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홍난파가 『어린이』에 실린 <고향의 봄>을 보고 작곡을 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27년 10월의 일이었다. 당시 동경고등음악학원에서 유학 중이던 난파는 창작동요의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이 곡 외에도 이때부터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 수많은 동요를 작곡하는데, 이는 1920년대에 가장 많은 동요를 작곡한 사람 중의 한 명이 홍난파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고향의 봄>은 그가 귀국한 후 발행한 『조선동요백곡집』에 수록되면서 한국인의 향수와 동심을 대표하는 노래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특히 나중에 음반으로도 제작 발매된 <고향의 봄>은, 1936년이 되면 ‘ 소년소녀현상동요대회’의 지정곡으로 선정될 정도로 창작동요의 대명사로 널리 불리어졌다.
동요는 1930년대에 들어오면 수많은 명작(名作) 동요가 앞을 다투어 발표되면서 그야말로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이 속에는 홍난파는 물론이고 <바위고개>의 이흥렬(李興烈), <고향생각>의 현제명(玄濟明), 그리고 1200개나 되는 동시(童詩)를 발표하고 그 가운데 800여 개가 동요로 만들어지는 윤석중(尹石重)의 업적도 빼놓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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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작곡가(1900~1986). 대표작으로 <기러기> <오빠생각> <맴맴> <사우(思友)> 등이 있는데, 1929년 자신의 창작동요집 『중중 때때중』을 통해 발표했다.
② 1923년 3월 16일 발족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단체. 이 해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5월 1일을 ‘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초대회장은 방정환이었고, 윤극영은 제3대 회장을 지냈다.
③ 이원수 「 자전회고록-흘러가는 세월 속에」 <월간소년> 1980년 10월호.
창가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며 신식 노래의 대명사로 불리어지던 1920년대, 이 땅에는 ‘동요(童謠)’라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막을 연 최초의 작품이 1924년 발표된 윤극영(尹克榮)의 <반달>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박태준(朴泰俊)①이라는 걸출한 동요작곡가가 있었지만, <반달>을 동요의 효시로 보는 것은 윤극영이 1926년 최초의 동요작곡집 『반달』을 발표하면서 동요의 진정한 태동기를 열었기 때문이다.
동요란 어린이의 정서를 표현한 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라고 정의할 수가 있겠는데, 창가와 일본노래가 범람하던 당시로서는 단지 어린이를 위한 노래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동요는 일본 창가를 대신할 민족 음악교육의 필요성에서 탄생했고, 조선인의 음악적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민족의 노래가 절실했던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일종의 ‘음악 문화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초의 동요인 <반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거라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과 설움을 그린 이 노래는 짧은 시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국민적 애창곡으로 불려졌다. 조선의 ‘반달’은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하늘을 떠다니지만,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는 ‘샛별’이 있다. 그 등대를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라는 희망의 메시지는 <반달>이 동요의 영역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노래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반달>은 2박자 계열의 일반 동요와는 달리 3박자 계열의 8분의 6박자를 사용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여기에 때마침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했다는 점도 태동기 동요의 전파에 날개를 달아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윤극영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홍난파보다 3년 늦게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작곡과 성악을 전공했다. 법학을 포기하고 유학길에 오른 그는 도쿄에서 홍난파와 방정환(方定煥)을 만나 음악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특히 방정환 등과 1923년 ‘색동회’②를 조직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음악과 문화운동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의 중심 매체가 그해 방정환에 의해 창간된 아동잡지 『어린이』였다.
『어린이』는 이후 한국 아동문학과 창작동요의 메카로서 더 없이 소중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윤극영의 <반달>이 발표된 것도 이 잡지를 통해서였고, 홍난파의 <고향의 봄>이 세상에 나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바로 잡지 『어린이』를 통해서였다.
1926년 4월호 『어린이』에는 동요 입선작이 발표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당시 마산의 성호보통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원수(李元壽)의 작품 <고향의 봄>이었다. 당시 15세였던 이원수는 소년회 활동을 통해 어린이운동의 선구자 방정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이 잡지에 원고를 보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당선작으로 소개가 되었던 것이다.
경남 양산(梁山)에서 태어난 이원수는 곧 창원(昌原)으로 이사를 해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창원은 인근 마산(馬山)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가 아름답게 펼쳐진 ‘꽃대궐 동네’였다.③
15살 소년은 어린 시절 ‘꽃피는 산골’에 대한 추억과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에서 놀던 때를 그리워하며 이 시를 썼던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홍난파가 『어린이』에 실린 <고향의 봄>을 보고 작곡을 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27년 10월의 일이었다. 당시 동경고등음악학원에서 유학 중이던 난파는 창작동요의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이 곡 외에도 이때부터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 수많은 동요를 작곡하는데, 이는 1920년대에 가장 많은 동요를 작곡한 사람 중의 한 명이 홍난파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고향의 봄>은 그가 귀국한 후 발행한 『조선동요백곡집』에 수록되면서 한국인의 향수와 동심을 대표하는 노래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특히 나중에 음반으로도 제작 발매된 <고향의 봄>은, 1936년이 되면 ‘ 소년소녀현상동요대회’의 지정곡으로 선정될 정도로 창작동요의 대명사로 널리 불리어졌다.
동요는 1930년대에 들어오면 수많은 명작(名作) 동요가 앞을 다투어 발표되면서 그야말로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이 속에는 홍난파는 물론이고 <바위고개>의 이흥렬(李興烈), <고향생각>의 현제명(玄濟明), 그리고 1200개나 되는 동시(童詩)를 발표하고 그 가운데 800여 개가 동요로 만들어지는 윤석중(尹石重)의 업적도 빼놓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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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작곡가(1900~1986). 대표작으로 <기러기> <오빠생각> <맴맴> <사우(思友)> 등이 있는데, 1929년 자신의 창작동요집 『중중 때때중』을 통해 발표했다.
② 1923년 3월 16일 발족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단체. 이 해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5월 1일을 ‘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초대회장은 방정환이었고, 윤극영은 제3대 회장을 지냈다.
③ 이원수 「 자전회고록-흘러가는 세월 속에」 <월간소년> 198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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