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경남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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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3,089회 작성일 15-04-16 11:48본문
게재일 : 2014년 03월 01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꽃대궐 차린 동네’ 우리 모두의 고향
동요 「고향의 봄」 배경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
지난해 8월 3일 광부와 간호사 독일 파견 50주년 기념 KBS 가요무대 특별공연이 펼쳐진 독일 보쿰시의 루어 콩그레스 보쿰(Ruhr Congress Bochum). 파독간호사 출신 100명으로 구성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연합 어머니합창단과 전 출연자가 동요 「고향의 봄」을 부르자 독일 각지에서 온 3000여 동포들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한 달 뒤인 지난해 9월 18일 제68차 유엔총회 개막 이튿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참석한 유엔본부 옆 마당 '세계평화의 날' 기념행사장에서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이보다 석 달 앞선 6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첫날 환영만찬장에서도 합창단이 「고향의 봄」을 불렀다.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 살고 있는 이들, 특히 타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크고 작은 모임이나 행사에서 동요 「고향의 봄」은 「아리랑」과 함께 빠지지 않고 불리는 노래다. 그때마다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애잔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리랑」이 우리민족의 한이 담겨있는 대표 민요라면 「고향의 봄」은 정이 듬뿍 담겨있는 대표 국민동요다. 모임이나 행사가 아니라도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봄꽃이 여기저기서 시샘하듯 피는 3월과 4월 언덕위에 꽃 핀 모습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동요 「고향의 봄」을 떠올린다. 굳이 이런 장면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이맘때쯤 고향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랫말을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동요 「고향의 봄」이 이렇게 사랑받는 연유는 가사가 전형적인 7·5조의 율격인데다 4분의 4박자에 내림 나장조의 곡이라 남녀노소 모두 따라 부르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낭만적인 느낌의 노랫말이 고향생각을 자극하는데다 곡의 선율은 어린이들에게는 경쾌하게 다가가면서도 어른들에겐 공허한 마음을 의탁하게 하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동요지만, 어린이보다 어른들에게 더 익숙한 노래이기도 하다.
「고향의 봄」은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을 문단에 등장하게 한 시이자 선생의 대표작이다. 열여섯 살 때인 1926년 잡지 <어린이>에 발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고향에 대한 추억을 애달프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 소년 이원수의 감성이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대체로 어린 시절 살았던 곳과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게 배경이라고 본다.
1911년 양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이듬해에 창원으로 이사했다. 지금의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이다. 조선 성종 때 축조됐던 창원읍성의 흔적이 남아있을 때다. 선생은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살다 1921년 인근 김해시 진영으로 이사한다. 다음해 다시 마산으로 옮겼다. 마산으로 이사한 지 3년만인 1925년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 「고향의 봄」을 발표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가장 길게 보낸 의창동이 노랫말의 배경으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남해고속도로가 가로지르는 의창동 뒤쪽 천주산 자락이 비스듬한 언덕이라 노랫말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봄이면 어우러졌을 듯하다. 짧게 살았지만 진영의 산과 들, 아버지를 여의고 따뜻한 봄날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집밖에서 시간을 보냈을 마산도 소년 이원수의 정서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고향의 봄」의 배경은 노랫말에서 묘사된 서경(敍景)과 그기에 담긴 서정(敍情)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국민 모두의 고향으로 다가온다.
마산 산호공원과 양산 춘추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또 해마다 4월이면 창원시 일원에서 창원예총과 고향의봄기념사업회, MBC경남, 천주산진달래축제위원회가 주관하는 '고향의 봄 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에는 '창원 어린이 고향의 봄 잔치'와 'MBC경남 고향의 봄 창작동요제'를 비롯해 백일장, 음악회,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또 「고향의 봄」 창작 배경지라 할 수 있는 천주산에서는 진달래축제도 펼쳐진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꽃대궐 차린 동네’ 우리 모두의 고향
동요 「고향의 봄」 배경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
지난해 8월 3일 광부와 간호사 독일 파견 50주년 기념 KBS 가요무대 특별공연이 펼쳐진 독일 보쿰시의 루어 콩그레스 보쿰(Ruhr Congress Bochum). 파독간호사 출신 100명으로 구성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연합 어머니합창단과 전 출연자가 동요 「고향의 봄」을 부르자 독일 각지에서 온 3000여 동포들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한 달 뒤인 지난해 9월 18일 제68차 유엔총회 개막 이튿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참석한 유엔본부 옆 마당 '세계평화의 날' 기념행사장에서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이보다 석 달 앞선 6월 27일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첫날 환영만찬장에서도 합창단이 「고향의 봄」을 불렀다.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 살고 있는 이들, 특히 타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크고 작은 모임이나 행사에서 동요 「고향의 봄」은 「아리랑」과 함께 빠지지 않고 불리는 노래다. 그때마다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애잔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리랑」이 우리민족의 한이 담겨있는 대표 민요라면 「고향의 봄」은 정이 듬뿍 담겨있는 대표 국민동요다. 모임이나 행사가 아니라도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봄꽃이 여기저기서 시샘하듯 피는 3월과 4월 언덕위에 꽃 핀 모습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동요 「고향의 봄」을 떠올린다. 굳이 이런 장면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이맘때쯤 고향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랫말을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동요 「고향의 봄」이 이렇게 사랑받는 연유는 가사가 전형적인 7·5조의 율격인데다 4분의 4박자에 내림 나장조의 곡이라 남녀노소 모두 따라 부르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낭만적인 느낌의 노랫말이 고향생각을 자극하는데다 곡의 선율은 어린이들에게는 경쾌하게 다가가면서도 어른들에겐 공허한 마음을 의탁하게 하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동요지만, 어린이보다 어른들에게 더 익숙한 노래이기도 하다.
「고향의 봄」은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을 문단에 등장하게 한 시이자 선생의 대표작이다. 열여섯 살 때인 1926년 잡지 <어린이>에 발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고향에 대한 추억을 애달프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 소년 이원수의 감성이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대체로 어린 시절 살았던 곳과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게 배경이라고 본다.
1911년 양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이듬해에 창원으로 이사했다. 지금의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이다. 조선 성종 때 축조됐던 창원읍성의 흔적이 남아있을 때다. 선생은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살다 1921년 인근 김해시 진영으로 이사한다. 다음해 다시 마산으로 옮겼다. 마산으로 이사한 지 3년만인 1925년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 「고향의 봄」을 발표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가장 길게 보낸 의창동이 노랫말의 배경으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남해고속도로가 가로지르는 의창동 뒤쪽 천주산 자락이 비스듬한 언덕이라 노랫말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봄이면 어우러졌을 듯하다. 짧게 살았지만 진영의 산과 들, 아버지를 여의고 따뜻한 봄날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집밖에서 시간을 보냈을 마산도 소년 이원수의 정서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고향의 봄」의 배경은 노랫말에서 묘사된 서경(敍景)과 그기에 담긴 서정(敍情)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리국민 모두의 고향으로 다가온다.
마산 산호공원과 양산 춘추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또 해마다 4월이면 창원시 일원에서 창원예총과 고향의봄기념사업회, MBC경남, 천주산진달래축제위원회가 주관하는 '고향의 봄 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에는 '창원 어린이 고향의 봄 잔치'와 'MBC경남 고향의 봄 창작동요제'를 비롯해 백일장, 음악회,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또 「고향의 봄」 창작 배경지라 할 수 있는 천주산에서는 진달래축제도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