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생각에 관한 기사자료 / 충청매일 2012년 2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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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322회 작성일 15-04-16 11:21본문
화류계에서도 애창됐던 ‘오빠생각’
‘오빠생각’은 과거엔 모르는 이가 없던 유명한 동요이다. 박태준이 곡을 붙여 노래가 유행함으로써 널리 유명해졌다.
이 노래는 1925년 어린이 잡지에 실린 11세 소녀 최순애의 동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이다. 훗날 아동문학가가 된 최순애는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씨의 부인이 되었다.
이 ‘오빠생각’과 박태준에 관한 이야기가 ‘계명 100년사’속에 있었다. 동요 작가 김성도 교사가 1956년에 ‘계성과 동요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인데 박태준과 직접 관련된 부분을 간추려 소개한다.
계성과 동요운동
교사 김성도
계성은 한국초창기 동요운동에 특수한 공로가 있다고 본다. 무릇 동요운동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고 본다. 문예작품으로서의 동요 창작과, 이 동요에 곡을 붙이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3대 동요 시인을 말할 때, 윤석중, 윤복진, 박영종(목월)을 꼽는다. 그런데 그중의 윤복진, 박영종 두 시인이 바로 계성 출신인 것이다. 그 중 윤복진은 행방을 알 수 없고, 박영종은 시로 전향하였으나, 그들의 공적은 동요 사상에 엄연히 빛나는 것이다.
다음, 곡으로서의 동요운동에는 박태준 박사의 공이 지대하였음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뜸북 뜸븍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울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주: 이 글에는 2절은 없다. 필자가 덧붙인 것이다.)
이 뜸북새의 노래(‘오빠생각’)야말로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다투어 부르던 동요이다. 그러니 벌써 30년 전이다.(주: 이 글이 쓰여진 1956년부터 30년 전 즉 1920년대) 한국에 노래가 없어 굶주렸던 그 때에 이것이 나오자 요원의 불같이 퍼졌다. 이 당시 같이 불리던 것은 윤극영씨의 ‘반달’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즈음의 사람들은 동요에만 굶주린 것이 아니라, 노래에 굶주렸던 터이라 ‘반달’과 ‘뜸북새’는 화류계까지 퍼져 애창되었었다.
이 ‘뜸북새’의 작곡자가 바로 계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박태준 박사이다. 당시 박 선생은 서양 가곡집을 내었고, 그 말미에 박태준 작곡을 부록으로 넣어서 가곡 운동에도 선구자적 공을 세우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공은 그의 동요 작곡에 있었다.
박태준 선생은 학교 수업을 필하면 강당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하였다. 강당 문을 꼭 잠그시고,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면서 오선지에 곡을 그려 넣던 것은 지금도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하다. 작곡이 되면 이어 등사가 되어 음악시간에 학생들에게 배부된다. 이것을 배운 학생들은 바로 다음 주일이면 교회 유년 주일학교에서, 또는 야학교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리하여 박태준 선생님의 곡은 그대로 대구 전 시에 퍼졌고 방학이 되면 프린트되어 시골로 퍼져서 보급되었다. 또한 멀지 않아서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정식(언론인·뉴스1 사장)
‘오빠생각’은 과거엔 모르는 이가 없던 유명한 동요이다. 박태준이 곡을 붙여 노래가 유행함으로써 널리 유명해졌다.
이 노래는 1925년 어린이 잡지에 실린 11세 소녀 최순애의 동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이다. 훗날 아동문학가가 된 최순애는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씨의 부인이 되었다.
이 ‘오빠생각’과 박태준에 관한 이야기가 ‘계명 100년사’속에 있었다. 동요 작가 김성도 교사가 1956년에 ‘계성과 동요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인데 박태준과 직접 관련된 부분을 간추려 소개한다.
계성과 동요운동
교사 김성도
계성은 한국초창기 동요운동에 특수한 공로가 있다고 본다. 무릇 동요운동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고 본다. 문예작품으로서의 동요 창작과, 이 동요에 곡을 붙이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3대 동요 시인을 말할 때, 윤석중, 윤복진, 박영종(목월)을 꼽는다. 그런데 그중의 윤복진, 박영종 두 시인이 바로 계성 출신인 것이다. 그 중 윤복진은 행방을 알 수 없고, 박영종은 시로 전향하였으나, 그들의 공적은 동요 사상에 엄연히 빛나는 것이다.
다음, 곡으로서의 동요운동에는 박태준 박사의 공이 지대하였음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뜸북 뜸븍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울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주: 이 글에는 2절은 없다. 필자가 덧붙인 것이다.)
이 뜸북새의 노래(‘오빠생각’)야말로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다투어 부르던 동요이다. 그러니 벌써 30년 전이다.(주: 이 글이 쓰여진 1956년부터 30년 전 즉 1920년대) 한국에 노래가 없어 굶주렸던 그 때에 이것이 나오자 요원의 불같이 퍼졌다. 이 당시 같이 불리던 것은 윤극영씨의 ‘반달’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즈음의 사람들은 동요에만 굶주린 것이 아니라, 노래에 굶주렸던 터이라 ‘반달’과 ‘뜸북새’는 화류계까지 퍼져 애창되었었다.
이 ‘뜸북새’의 작곡자가 바로 계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박태준 박사이다. 당시 박 선생은 서양 가곡집을 내었고, 그 말미에 박태준 작곡을 부록으로 넣어서 가곡 운동에도 선구자적 공을 세우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공은 그의 동요 작곡에 있었다.
박태준 선생은 학교 수업을 필하면 강당 피아노 앞에서 작곡을 하였다. 강당 문을 꼭 잠그시고,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면서 오선지에 곡을 그려 넣던 것은 지금도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하다. 작곡이 되면 이어 등사가 되어 음악시간에 학생들에게 배부된다. 이것을 배운 학생들은 바로 다음 주일이면 교회 유년 주일학교에서, 또는 야학교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리하여 박태준 선생님의 곡은 그대로 대구 전 시에 퍼졌고 방학이 되면 프린트되어 시골로 퍼져서 보급되었다. 또한 멀지 않아서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정식(언론인·뉴스1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