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아름다움 / 내일신문 - 문창재 칼럼 (201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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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298회 작성일 15-04-16 11:17본문
[문창재 칼럼]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아름다움
문창재 본지 논설고문
조상의 이름은 클수록 좋고, 빚은 적을수록 좋다. 이름이나 빚이나 모두 후세에 물려지는 법이다. 조상의 큰 이름을 자랑하기는 쉬워도, 빚을 인정하고 갚기는 어려운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래서 조상의 빚을 갚으려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유명한 것은 뛰어난 시재 때문이 아니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할아버지 행적을 뒤늦게 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평생을 떠돌았기에 사람들 기억에 감동으로 각인된 것이다.
인간도살장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 소장의 딸은 아버지가 진 천형 같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을 사죄순례와 피해보상 운동에 바쳤다. 오래 전 외신기사가 뇌리에 남아 있는 것도 그 용기와 양심에 감동한 탓이다.
동요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이원수(李元壽)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 유족이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사죄했다는 이야기는 더 큰 감동이었다.
11월 22일 경남 창원시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의 둘째딸(이정옥·66)이 "아버지를 존경하던 분들이 큰 상처를 입고 배신감을 느낀 것을 이해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하고 사죄했다.
딸은 아버지가 친일활동을 한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자랑스럽지 않은 일을 아버지가 자식에게 고백했을 리도 없다.
한국인에게 민요처럼 불리는 '고향의 봄' 노랫말 작가의 딸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그는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 이름이 오른 것을 보고 처음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알았다고 한다.
기념사업을 반대한 시민단체들이 문제 삼은 이원수의 친일행적은 1940년에 발표한 글 '고도(古都)의 감회-부여신궁 어조영(夫餘神宮御造營) 봉사 작업에 다녀와서', 1942년 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쓴 '학도지원병을 보내며' '낙하산' 등 몇 편으로 알려져 있다.
동요작가 이원수씨 따님의 사죄
부여신궁 건설현장에서 노력봉사를 한 동원 체험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청년들의 학도병 지원을 격려한 글이 제국주의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임은 알아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마산상업학교를 나와 함안금융조합 직원이 된 이원수는 독서회 모임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함안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10개월 옥고를 치른 반일활동 전력이 있다.
그가 금융조합에 복직하고 결혼을 한 뒤 변절한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선비적인 양심보다는 가족과 자신의 신변안전에 마음을 빼앗긴 소시민이 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름 없는 시골 동요시인의 금융조합 기관지 글이 얼마나 영향력을 끼쳤을지는 알 길이 없다. 명성이 뜨르르했던 춘원 이광수나 김동인, 주요한, 김동환, 모윤숙, 서정주, 유치진, 최재서 같은 친일문인들과는 비유도 안되는 인물이었음도 틀림없다.
"지금부터 2600년 전 신무천황께서 어(御)즉위하신 고큐산[香久山]에서 香山을 따고, 光洙의 光자는 그대로 쓰고, 洙는 일본이름 식으로 郞으로 바꾸었다"고 창씨개명 이름풀이까지 발표했던 춘원은 일제 말기 일본어로 소설을 썼다. "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글을 쓸 정도였다.
그 이름 높은 문인과 자손들이 어떻게 한때의 과오를 청산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원수의 딸처럼 용기 있는 일을 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되도록 과거를 묻어두고 책임을 피하려 했던 본인들의 비겁하고 뻔뻔한 언행도 국민의 공분을 샀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끌려간 춘원은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비하면 "정말 해방이 될 줄 모르고 친일을 했다"고 한 서정주의 고백은 사뭇 인간적이다.
선대 대신해 용서와 사과 구한다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우여곡절 끝에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는 5000명 가까운 이름이 들어 있다. 그들의 후손은 대체로 잘 되었다는 것이 사회적인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할아버지의 '원죄'를 인정하는 이가 드물어 간접적인 청산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아무 책임이 없는 자손들이지만, 선대를 대신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친일문제를 둘러싼 반목은 크게 완화될 것이다. 이원수를 대신한 딸의 사죄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을까.
진솔한 말 한마디, 한번의 고개숙임이 아버지 할아버지 죗값을 씻는 아름다운 행동이라는 걸 그들이 다 깨닫기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문창재 본지 논설고문
조상의 이름은 클수록 좋고, 빚은 적을수록 좋다. 이름이나 빚이나 모두 후세에 물려지는 법이다. 조상의 큰 이름을 자랑하기는 쉬워도, 빚을 인정하고 갚기는 어려운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래서 조상의 빚을 갚으려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유명한 것은 뛰어난 시재 때문이 아니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할아버지 행적을 뒤늦게 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평생을 떠돌았기에 사람들 기억에 감동으로 각인된 것이다.
인간도살장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 소장의 딸은 아버지가 진 천형 같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을 사죄순례와 피해보상 운동에 바쳤다. 오래 전 외신기사가 뇌리에 남아 있는 것도 그 용기와 양심에 감동한 탓이다.
동요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이원수(李元壽)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 유족이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사죄했다는 이야기는 더 큰 감동이었다.
11월 22일 경남 창원시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의 둘째딸(이정옥·66)이 "아버지를 존경하던 분들이 큰 상처를 입고 배신감을 느낀 것을 이해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하고 사죄했다.
딸은 아버지가 친일활동을 한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자랑스럽지 않은 일을 아버지가 자식에게 고백했을 리도 없다.
한국인에게 민요처럼 불리는 '고향의 봄' 노랫말 작가의 딸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그는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 이름이 오른 것을 보고 처음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알았다고 한다.
기념사업을 반대한 시민단체들이 문제 삼은 이원수의 친일행적은 1940년에 발표한 글 '고도(古都)의 감회-부여신궁 어조영(夫餘神宮御造營) 봉사 작업에 다녀와서', 1942년 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쓴 '학도지원병을 보내며' '낙하산' 등 몇 편으로 알려져 있다.
동요작가 이원수씨 따님의 사죄
부여신궁 건설현장에서 노력봉사를 한 동원 체험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청년들의 학도병 지원을 격려한 글이 제국주의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임은 알아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마산상업학교를 나와 함안금융조합 직원이 된 이원수는 독서회 모임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함안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10개월 옥고를 치른 반일활동 전력이 있다.
그가 금융조합에 복직하고 결혼을 한 뒤 변절한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선비적인 양심보다는 가족과 자신의 신변안전에 마음을 빼앗긴 소시민이 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름 없는 시골 동요시인의 금융조합 기관지 글이 얼마나 영향력을 끼쳤을지는 알 길이 없다. 명성이 뜨르르했던 춘원 이광수나 김동인, 주요한, 김동환, 모윤숙, 서정주, 유치진, 최재서 같은 친일문인들과는 비유도 안되는 인물이었음도 틀림없다.
"지금부터 2600년 전 신무천황께서 어(御)즉위하신 고큐산[香久山]에서 香山을 따고, 光洙의 光자는 그대로 쓰고, 洙는 일본이름 식으로 郞으로 바꾸었다"고 창씨개명 이름풀이까지 발표했던 춘원은 일제 말기 일본어로 소설을 썼다. "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글을 쓸 정도였다.
그 이름 높은 문인과 자손들이 어떻게 한때의 과오를 청산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원수의 딸처럼 용기 있는 일을 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되도록 과거를 묻어두고 책임을 피하려 했던 본인들의 비겁하고 뻔뻔한 언행도 국민의 공분을 샀다.
광복 후 반민특위에 끌려간 춘원은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비하면 "정말 해방이 될 줄 모르고 친일을 했다"고 한 서정주의 고백은 사뭇 인간적이다.
선대 대신해 용서와 사과 구한다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우여곡절 끝에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는 5000명 가까운 이름이 들어 있다. 그들의 후손은 대체로 잘 되었다는 것이 사회적인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할아버지의 '원죄'를 인정하는 이가 드물어 간접적인 청산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아무 책임이 없는 자손들이지만, 선대를 대신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친일문제를 둘러싼 반목은 크게 완화될 것이다. 이원수를 대신한 딸의 사죄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을까.
진솔한 말 한마디, 한번의 고개숙임이 아버지 할아버지 죗값을 씻는 아름다운 행동이라는 걸 그들이 다 깨닫기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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