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다 / 고향의 봄 노래 부르며 고향의 봄길 따라 걸으며 /경남신문 2011년 8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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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530회 작성일 15-04-16 11:06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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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고향의 봄’ 노래 부르며 ‘고향의 길’ 따라 걸으며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중략)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이원수 1980년 수필 ‘흘러가는 세월 속에’ 中
동요 ‘고향의 봄’ 산실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꽃대궐’ 김종영 선생 생가 근대문화유산 지정돼 잘 보존
‘파란들’ 남산 자락 옛모습 잃었지만 남산공원 가볼만
고향의 봄길로 지정된 소답동 창원초등학교 입구 ~ 김종영 선생 생가 이면도로.
‘고향의 봄’ 노랫말에서 ‘꽃대궐’로 표현된 조각가 김종영 선생 생가. /김승권기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노랫말로 친숙한 국민동요 ‘고향의 봄’.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 선생이 15세 때 쓴 이 동요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음악 교재뿐만 아니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벤(延邊) 조선족자치주 초등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이미 ‘민족의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 이후 들이닥친 ‘산업화 쓰나미’로 인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우리 국민들은 언제부터인가 삶에 지치거나 ‘향수(鄕愁)’에 사무칠 때 자신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탄생했을까.놀랍게도 창원시 천주산 아래 소답동 일원이다.
하지만 상당수 창원시민들은 아직도 ‘고향의 봄’ 동요가 소답동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선생이 유년기를 보내며 깊은 내면으로부터 순수 감성을 발현하고, 문학소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줬던 소답동 일원의 문화적 토양을 잘 정비하고 스토리텔링까지 가미한다면,
국내외 7000만 우리 민족의 ‘마음 속 고향’으로 거듭나면서 ‘고향의 메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진하다.
선생이 지난 1980년에 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수필을 보면, 1920년대 전후의 창원 소답동은 읍성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양산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이사해 아홉 살 때까지 살았던 이곳이 선생의 동심 속에는
‘작고 초라한 성문 밖 개울, 서당 마을의 꽃,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밭’이 있는 서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또 이원수 선생이 쓴 ‘엄마 기다리는 아이의 노래’라는 글을 보면 어린 나이에 접한 천주산을 그리는 문장이 나오는데, 무척 웅대하게 묘사돼 눈길을 끈다.
‘나는 여섯 살, 누나는 아홉 살,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저녁 때가 되어도 오시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가신 산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천주산이다. 하늘같이 높고 땅덩이만큼 큰 산이었다.’
‘어머니’라는 작품에서도 소답동 뒤 야산인 북산과 천주산을 이렇게 기억했다.
‘동무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는 곧잘 북산으로 놀러가곤 했었다. 북산은 마을 뒷산으로 그리 크지 않은 산이었다.
그러나 천주산은 높고 컸다. 지금도 천주산을 생각하면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천주산은 나에겐 위대한 산이요, 내 어머니와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선생의 순수 감성은 15세 때에 ‘고향의 봄’ 노랫말을 쓰게 하는 토양이 됐고, 당시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에 투고해 은상으로 당선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그러면 지금의 소답동에는 ‘이원수 선생의 발자취’가 어떤 상태로 남아 있을까.
4~6세 때 살았던 북동리 207번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못 이기고 집터만 남아 기념사업회에서 지난 2004년 ‘이원수 선생 4~6세 성장지’ 표지석을 세웠다.
이원수 선생의 유년기 추억이 새겨진 창원읍성터는 일제강점기 경전선 철로 개설로 파괴되기 시작해 도시 형성 과정에서 대부분 헐려 없어졌으나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흔적이 50m가량 조금씩 남아 있다.
고향의 봄 노랫말 속 ‘꽃대궐’은 한국 조각사의 한 획을 그은 우성 김종영 (1915~1982)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잘 보존돼 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의 근대 한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본과 중국의 영향까지 볼 수 있는 귀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지붕 위 누각이 올려진 별채 사미루는 중국인 석수가 건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입증될 정도로 중국풍의 건축양식도 보인다.
이원수 선생의 ‘정서적 샘’ 역할을 했던 천주산은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향의 봄에서 파란 들로 표현된 남산은 지금은 개발로 자연스런 옛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정상에 조성된 남산공원에는 창원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적과 창원대도호부 비석이 남아 있어 들를 만한 곳이다.
소답동 창원초등학교 입구부터 김종영 선생 생가까지 이면도로는 올해 창원시에 의해 ‘고향의 봄길’로 지정돼, 이원수 선생의 삶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호젓한 주말, 가족과 함께 ‘이념의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아동문학의 거목을 성장시킨 토양 속으로 빠져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그곳에 가고 싶다] ‘고향의 봄’ 노래 부르며 ‘고향의 길’ 따라 걸으며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중략)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이원수 1980년 수필 ‘흘러가는 세월 속에’ 中
동요 ‘고향의 봄’ 산실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꽃대궐’ 김종영 선생 생가 근대문화유산 지정돼 잘 보존
‘파란들’ 남산 자락 옛모습 잃었지만 남산공원 가볼만
고향의 봄길로 지정된 소답동 창원초등학교 입구 ~ 김종영 선생 생가 이면도로.
‘고향의 봄’ 노랫말에서 ‘꽃대궐’로 표현된 조각가 김종영 선생 생가. /김승권기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노랫말로 친숙한 국민동요 ‘고향의 봄’.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 선생이 15세 때 쓴 이 동요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음악 교재뿐만 아니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벤(延邊) 조선족자치주 초등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이미 ‘민족의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 이후 들이닥친 ‘산업화 쓰나미’로 인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우리 국민들은 언제부터인가 삶에 지치거나 ‘향수(鄕愁)’에 사무칠 때 자신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탄생했을까.놀랍게도 창원시 천주산 아래 소답동 일원이다.
하지만 상당수 창원시민들은 아직도 ‘고향의 봄’ 동요가 소답동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선생이 유년기를 보내며 깊은 내면으로부터 순수 감성을 발현하고, 문학소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줬던 소답동 일원의 문화적 토양을 잘 정비하고 스토리텔링까지 가미한다면,
국내외 7000만 우리 민족의 ‘마음 속 고향’으로 거듭나면서 ‘고향의 메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진하다.
선생이 지난 1980년에 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수필을 보면, 1920년대 전후의 창원 소답동은 읍성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양산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이사해 아홉 살 때까지 살았던 이곳이 선생의 동심 속에는
‘작고 초라한 성문 밖 개울, 서당 마을의 꽃,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밭’이 있는 서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또 이원수 선생이 쓴 ‘엄마 기다리는 아이의 노래’라는 글을 보면 어린 나이에 접한 천주산을 그리는 문장이 나오는데, 무척 웅대하게 묘사돼 눈길을 끈다.
‘나는 여섯 살, 누나는 아홉 살,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셨는데,
저녁 때가 되어도 오시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가신 산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천주산이다. 하늘같이 높고 땅덩이만큼 큰 산이었다.’
‘어머니’라는 작품에서도 소답동 뒤 야산인 북산과 천주산을 이렇게 기억했다.
‘동무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는 곧잘 북산으로 놀러가곤 했었다. 북산은 마을 뒷산으로 그리 크지 않은 산이었다.
그러나 천주산은 높고 컸다. 지금도 천주산을 생각하면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천주산은 나에겐 위대한 산이요, 내 어머니와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선생의 순수 감성은 15세 때에 ‘고향의 봄’ 노랫말을 쓰게 하는 토양이 됐고, 당시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에 투고해 은상으로 당선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그러면 지금의 소답동에는 ‘이원수 선생의 발자취’가 어떤 상태로 남아 있을까.
4~6세 때 살았던 북동리 207번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못 이기고 집터만 남아 기념사업회에서 지난 2004년 ‘이원수 선생 4~6세 성장지’ 표지석을 세웠다.
이원수 선생의 유년기 추억이 새겨진 창원읍성터는 일제강점기 경전선 철로 개설로 파괴되기 시작해 도시 형성 과정에서 대부분 헐려 없어졌으나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흔적이 50m가량 조금씩 남아 있다.
고향의 봄 노랫말 속 ‘꽃대궐’은 한국 조각사의 한 획을 그은 우성 김종영 (1915~1982)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잘 보존돼 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의 근대 한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본과 중국의 영향까지 볼 수 있는 귀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지붕 위 누각이 올려진 별채 사미루는 중국인 석수가 건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입증될 정도로 중국풍의 건축양식도 보인다.
이원수 선생의 ‘정서적 샘’ 역할을 했던 천주산은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향의 봄에서 파란 들로 표현된 남산은 지금은 개발로 자연스런 옛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정상에 조성된 남산공원에는 창원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유적과 창원대도호부 비석이 남아 있어 들를 만한 곳이다.
소답동 창원초등학교 입구부터 김종영 선생 생가까지 이면도로는 올해 창원시에 의해 ‘고향의 봄길’로 지정돼, 이원수 선생의 삶을 소개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호젓한 주말, 가족과 함께 ‘이념의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아동문학의 거목을 성장시킨 토양 속으로 빠져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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