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수 선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경남신문 20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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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수문학관 댓글 0건 조회 2,110회 작성일 15-04-16 11:00본문
이원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한 라운드를 넘긴 것 같다. 결국 기념사업회 측에서 사업 일부를 중지 또는 연기하면서 남은 시 예산을 반납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기념사업 추진을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 모두 이 문제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100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했던 기념사업회로서는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데 대한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을 것이고, 일반시민들로서도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조금 보완설명을 하고자 한다.
일부의 주장처럼 이원수 선생은 과연 친일작가인가? 아니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는가? 아시는 바와 같이 이원수 선생은 우리 고장이 낳은 유수의 아동문학가다. ‘고향의 봄’ 동시를 15살 때 썼으니 문학적 재질은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11년에 태어나 1981년 작고할 때까지 동시, 동화, 동극, 수필, 평론 등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암울한 일제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반은 식민지통치시대에 살았고 나머지 반은 광복된 조국에서 살았다. 그의 삶이 바로 우리 민족의 질곡의 근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일제시대 말기 한두 해 동안에 그가 근무하던 함안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한 친일작품 5편에 대해서다. 1000편 중 5편이면 극소수이긴 하나 친일작품이라면 단 1편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왜 그런 작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누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친일행위라 하고, 또 누구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생계형 친일이라 한다. 생계형 친일이란 말이 옹색한 변명이긴 하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적극적 친일과는 분명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아무튼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처럼 징용을 선동하는 강연을 다니거나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신문에 싣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이태준이나 정지용처럼 절필을 하지도 않았고, 이육사나 김사량처럼 목숨을 걸고 저항시를 쓴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적당히 일제의 억압에 굴종하며 삶을 영위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가 친일작가의 오명을 쓰게 된 이유다.
그에 대해 또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른바 독서회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른 경력도 있다는 것이다. 독서회란 몇몇 지인들끼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순수한 독서클럽이었는데, 일제가 불순한 모임으로 몬 사건을 말한다. 이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다소 애매하긴 하나, 어떻든 그가 젊은 날에 이런 활동도 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렇든 저렇든 분명 그는 오점을 남긴 작가다. 생계형 친일이란 말도 사실 구차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가 메마른 이 땅 어린이들의 마음 밭을 일구어 가꾼 동심과, ‘고향의 봄’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심어 놓은 애틋한 그리움 또한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시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하는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할 것인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그를 영원히 친일작가로 낙인찍어 버릴지 판단은 순전히 시민의 몫이다.
어쨌든 간에 그의 행적을 낱낱이 밝혀서 공적은 공적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있는 그대로를 후대에 넘기는 일을 이번에 해야 한다. 사실 공과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큰 나무의 가지 몇 개가 썩었다고 해서 통째로 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깊이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이한영(경남아동문학회 부회장·아동극작가)
일부의 주장처럼 이원수 선생은 과연 친일작가인가? 아니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는가? 아시는 바와 같이 이원수 선생은 우리 고장이 낳은 유수의 아동문학가다. ‘고향의 봄’ 동시를 15살 때 썼으니 문학적 재질은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11년에 태어나 1981년 작고할 때까지 동시, 동화, 동극, 수필, 평론 등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암울한 일제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반은 식민지통치시대에 살았고 나머지 반은 광복된 조국에서 살았다. 그의 삶이 바로 우리 민족의 질곡의 근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일제시대 말기 한두 해 동안에 그가 근무하던 함안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한 친일작품 5편에 대해서다. 1000편 중 5편이면 극소수이긴 하나 친일작품이라면 단 1편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왜 그런 작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누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친일행위라 하고, 또 누구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생계형 친일이라 한다. 생계형 친일이란 말이 옹색한 변명이긴 하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적극적 친일과는 분명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아무튼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처럼 징용을 선동하는 강연을 다니거나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신문에 싣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이태준이나 정지용처럼 절필을 하지도 않았고, 이육사나 김사량처럼 목숨을 걸고 저항시를 쓴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적당히 일제의 억압에 굴종하며 삶을 영위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가 친일작가의 오명을 쓰게 된 이유다.
그에 대해 또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른바 독서회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른 경력도 있다는 것이다. 독서회란 몇몇 지인들끼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순수한 독서클럽이었는데, 일제가 불순한 모임으로 몬 사건을 말한다. 이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다소 애매하긴 하나, 어떻든 그가 젊은 날에 이런 활동도 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렇든 저렇든 분명 그는 오점을 남긴 작가다. 생계형 친일이란 말도 사실 구차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가 메마른 이 땅 어린이들의 마음 밭을 일구어 가꾼 동심과, ‘고향의 봄’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심어 놓은 애틋한 그리움 또한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시민들이 현명하게 판단하는 일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할 것인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그를 영원히 친일작가로 낙인찍어 버릴지 판단은 순전히 시민의 몫이다.
어쨌든 간에 그의 행적을 낱낱이 밝혀서 공적은 공적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있는 그대로를 후대에 넘기는 일을 이번에 해야 한다. 사실 공과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큰 나무의 가지 몇 개가 썩었다고 해서 통째로 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깊이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이한영(경남아동문학회 부회장·아동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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